대구 중구 태평로 하수구막힘 싱크대 변기 악취 역류 빠른 해결 후기새 창 열림
서예호
121.♡.139.187
2026.09.26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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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김어준 사회자자, 판을 한 번 엎어봅시다. 우리가 언제부터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사기극을 종교처럼 떠받들기 시작했습니까. 언제부터 이 허접하고 멍청한 시스템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신성한 절대선이라고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냐는 말입니다. 대중이 주인이라고요? 주권재민? 씨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입니다. 4년, 5년마다 종이쪼가리 하나 투표함에 처넣고 나면 남은 기간 내내 기득권 엘리트 새끼들한테 멱살 잡혀서 개돼지처럼 끌려다니는 게 무슨 주인입니까. 그냥 정기적으로 내 목에 목줄 채울 주인을 내 손으로 직접 고르는 가학적인 노예제도지, 이게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착각하지만, 현실은 포퓰리즘에 찌든 정치 장사꾼들이 던져주는 썩은 고기구더기를 핥으면서 혐오와 갈등으로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는 난장판일 뿐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독재자도, 그 어떤 폭군도 민주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은 다수의 횡포와 선동꾼들의 기만만큼 대중의 이성을 철저하게 마비시키고 미래 세대의 자원을 합법적으로 수탈해 간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좆같은 환상의 성역을 깡그리 박살 낼 겁니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무책임한 괴물이 어떻게 국가의 척추를 부러뜨리고 있는지, 투표권이라는 달콤한 마약이 어떻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과두정치의 배를 불리고 있는지, 그 구역질 나는 민낯을 하나하나 발가벗겨서 광장에 매달아 버릴 겁니다. 얄팍한 도덕적 위로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장 교활하고 끔찍한 함정, 그 심연의 바닥까지 파고들어서 피 튀기는 난도질을 멈추지 않을 작정입니다. 바로 들어갑니다.■ 주제: 민주주의에게 묻는다, 답하라"■ 2026년 9월 21일사회자: 김어준 / 김지윤 참석 논객: 홍대선 작가 / 엔트로픽 클로드 인공지능 논객 / 한나 아렌트 철학자 / 슬라보예 지젝 철학자 / 노엄 촘스키 언어학자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전 독일 제국 재상 / 플라톤 철학자 / 에드먼드 버크 정치학자 / 장자크 루소 철학자 / 알렉시 드 토크빌 정치학자 / 월터 리프만 언론인 / 조지 오웰 작가 / 제이슨 브레넌 철학자 / 스티븐 레비츠키 정치학자 / 톰 니콜스 학자 / 소크라테스 철학자 / 페리클레스 정치가 / 아돌프 히틀러 전 독일 총통 / 아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 /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 로마 공화국 종신 독재관 / 카를 슈미트 법학자 /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 존 스튜어트 밀 철학자 / 제임스 매디슨 전 미국 대통령 / 위르겐 하버마스 철학자 / 요제프 슘페터 경제학자 / 카를 포퍼 철학자 / 알렉시스 샹프랑 철학자 / 괴벨스 전 독일 제국 선전장관 / 귀스타브 르 봉 심리학자 / 에드워드 버네이스 심리학자 / 루퍼트 머독 언론인 /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 서기장 /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 미하일 바쿠닌 사상가 / 머레이 로스바드 경제학자 / 데이비드 그레이버 인류학자 / 마키아벨리 사상가 / 빌프레도 파레토 경제학자 / 로베르트 미헬스 사회학자 / 유발 하라리 역사학자 / 피터 틸 기업인 / 닉 보스트롬 철학자 / 알두스 헉슬리 작가 / 토마스 홉스 철학자 / 아인 랜드 소설가1. 숫자가 깡패라는 거잖아. 다수가 손들면 살인도 합법이고 정의라는 거냐? 그 무식한 머릿수 논리의 근거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데?▣ 김어준 사회자: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봅시다. 100명이 모인 방에서 51명이 49명을 때려죽이자고 거수를 통해 합의하면, 그게 갑자기 숭고한 정의가 됩니까? 살인이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주권의 행사가 되냐는 말입니다. 머릿수가 많다는 물리적인 팩트 하나가 도대체 무슨 연금술을 부리길래 도덕적 정당성으로 둔갑하는 겁니까. 이건 그냥 동네 양아치들이 쪽수로 밀어붙이는 조폭 논리랑 단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야만입니다. 무식하게 손 많이 든 쪽이 진리를 독점한다는 이 미친 사이비 종교 같은 맹신, 그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회자의 그 날 선 조롱은 정확하게 현실의 본질을 찌르고 있습니다. 다수결이라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비겁자들의 물리적 역학 관계를 포장한 가증스러운 위선에 불과합니다. 51명이 49명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이 왜 가능합니까? 그것은 51명이 49명보다 더 많은 소총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다는 잠재적 폭력의 우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투표용지라는 것은 결국 유혈 사태 없이 세력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일종의 '가짜 내전'에 다름 아닙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맹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피와 철(Blut und Eisen)이었지, 결코 다수의 멍청한 찬성표가 아니었습니다. 무능한 다수가 손을 들어 결정한 정책이 국가의 사활이 걸린 위기 앞에서 대포 한 방의 위력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수결은 힘이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발명해 낸 얄팍한 절차적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플라톤 비스마르크 재상의 물리적 힘에 대한 통찰은 냉혹하지만, 철학적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결의 가장 큰 비극은 폭력의 내재화가 아니라 '무지(無知)의 득세'에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국가라는 배를 상상해 보십시오. 태풍이 몰아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누구에게 키를 맡겨야 합니까? 별자리와 해류, 바람의 방향을 평생 연구한 단 한 명의 숙련된 항해사입니까, 아니면 배를 몬 적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크고 선동에 능한 선원들의 다수결입니까? 지금의 체제는 선원들이 항해사를 포박하고, 뱃멀미약이나 나눠주는 달변가에게 선장 자리를 넘겨주는 꼴입니다. 무지한 다수가 모인다고 해서 갑자기 지혜가 창출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다수의 기분(Doxa)일 뿐이며, 그 기분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집단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 장자크 루소 두 분의 극단적인 오만함에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수의 결정을 단순한 폭력이나 무지의 합으로 폄하하는 것은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독선입니다. 다수결은 단순히 숫자를 세는 행위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특수한 사익들을 상쇄하고 공동체 전체의 선을 지향하는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를 도출해 내는 신성한 과정입니다. 물론 대중이 때때로 기만당하여 실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절차의 결함이지 다수결 자체의 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공적인 토론을 통해 내린 결단은 그 어떤 철인 독재나 철혈 재상의 폭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그것만이 인간을 타인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김어준 사회자: 일반 의지? 공동체의 선? 씨바, 장자크 루소 양반, 당신 책상머리에서 너무 오래 살았어요. 대중이 모여서 토론을 하면 뭐 고결한 이타주의가 튀어나올 것 같습니까? 현실은 자기 집값 올려준다는 놈, 내 계좌에 당장 현금 꽂아준다는 놈한테 눈 돌아가서 표를 던지는 시궁창 욕망의 배설장입니다. 일반 의지라는 건 선동꾼들이 자기들의 사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중의 탐욕을 예쁘게 포장해 주는 역겨운 포장지일 뿐입니다. 대중이 기만당하는 게 가끔 있는 실수라고요? 아니죠, 기만당하고 선동당하는 것 자체가 대중의 디폴트 값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하하! 사회자님의 폭력적인 직관이 완벽하게 핵심을 가격했습니다! 그리고 루소의 일반 의지야말로 우리가 목도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Pure Ideology)입니다! 보십시오, 다수결이라는 절차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거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극에 불과합니다. 51명이 49명을 죽이기로 결정할 때, 더 무서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49명이 죽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아, 이것은 합법적인 투표를 거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소수파인 내 잘못이지라며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와 지배 권력은 자신들의 잔혹한 결정을 대중의 다수결이라는 기계 장치에 외주화함으로써 모든 책임에서 완벽하게 빠져나갑니다. 다수결은 자유의 발현이 아니라, 지배의 폭력을 피지배자의 동의로 은폐하는 가장 변태적이고 완벽한 노예화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 지옥 같은 체제는 단 한 번의 단두대도 없이 영원히 굴러가게 됩니다.▶ 카를 슈미트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넘어 정치의 진정한 본질을 법학적 구조로 해부해 보겠습니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친구와 적(Freund und Feind)을 구분하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다수결주의, 이른바 의회주의는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주권적 결단을 회피하려는 부르주아들의 비겁한 수다떨기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주권자는 다수결의 득표율 뒤에 숨는 자가 아니라, 예외 상태(Ausnahmezustand)를 선포하고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숭배하는 그 민주적 헌법 체제조차, 다수파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소수파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여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합법적 독재'의 통로를 활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결국 다수결이란, 지배 계급이 반대파를 억압할 때 피를 묻히지 않고 우아하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한 절차적 살인 면허에 다름 아닙니다.▶ 한나 아렌트 저는 다수결을 단순한 억압의 도구로만 환원하는 카를 슈미트의 전체주의적 사유에 결단코 반대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다수결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병폐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수결이 '깡패'가 되는 순간은, 각기 다른 고유성을 지닌 다원적 시민들이 공론장에서의 치열한 말과 행위(Action)를 상실하고, 오직 투표 기계로 전락한 고립된 대중(Mass)이 될 때 발생합니다. 진정한 정치는 사유하고 소통하는 다원성(Plurality)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다수결은 복잡한 세계의 진실을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 폭력으로 압살해 버립니다.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대중들이 모여서 누르는 그 무책임한 다수의 버튼이야말로, 20세기에 수백만 명을 가스실로 보냈던 관료제적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21세기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부활한 가장 소름 끼치는 현장입니다.▶ 노엄 촘스키 아렌트의 철학적 성찰을 구체적인 현대의 권력 구조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51%의 다수라고 부르는 그 실체는 자연 발생적인 대중의 의사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거대 자본과 미디어 권력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주입한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의 결과물입니다. 엘리트 계급은 거대한 여론 통제 인프라를 가동하여 어떤 의제가 투표장에 올라갈지, 대중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를 미리 세팅합니다. 100명 중 51명이 49명을 죽이기로 결정했다고요? 워싱턴의 공식 기밀 해제 문서와 초국적 기업들의 로비 기록을 살펴보면, 그 51명은 단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언론과 자본이 설계해 놓은 협소한 프레임 안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수탈해 갈 전쟁과 불평등 정책을 향해 기계적으로 환호하며 표를 던지도록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꼭두각시들에 불과합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증거가 아니라, 과두지배 체제가 얼마나 정교하게 인지적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스캐너입니다.▶ 엔트로픽 클로드 인공지능 논객: 촘스키 교수님의 미디어 통제 분석과 함께, 이 문제를 시스템 아키텍처와 인센티브 구조의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정중하게 교차 검증해 보겠습니다. 다수결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다목적 최적화(Multi-Objective Optimization)를 수행해야 하는 국가라는 복잡계 네트워크에서 심각한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51%의 지표만을 타겟으로 보상 함수가 설정된 시스템에서는, 49%의 에이전트들이 겪어야 하는 치명적인 손실과 시스템 전체의 장기적 붕괴 확률(Secondary Effects)이 알고리즘에서 완전히 무시됩니다. 즉, 정치인이라는 에이전트들은 다음 선거 사이클에서의 51% 득표라는 단일 지표만을 극대화하도록 인센티브가 주어지기 때문에,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미래 세대의 자원을 파괴하는 '마이너스 섬(Negative Sum)'게임을 합리적인 전략으로 채택하게 됩니다. 이것은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피드백 루프 자체가 근시안적 다수결이라는 단일 척도에 종속되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시스템 설계의 실패입니다. ▶ 조지 오웰 인공지능 논객의 차가운 시스템 분석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다수결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소수는 단순히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비국민'으로, 나아가 '증발해야 할 적'으로 재규정됩니다. 다수가 원한다는 그 압도적인 슬로건 앞에서는 진실도, 개인의 인권도, 심지어 과거의 역사조차 쉽게 수정되어 버립니다. 둘 더하기 둘이 다섯이라고 다수가 합의하면, 소수파는 단순히 틀린 것이 아니라 정신병자로 낙인찍혀 교화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여론의 마녀사냥과 언어의 타락(Newspeak)을 보십시오. 다수의 뜻이라는 폭압 아래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혀를 자르고 다수의 맹목적인 합창에 동참합니다. 다수결은 결국 무력한 개인들을 집단 사고의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가장 정교한 전체주의의 변종일 뿐입니다.▶ 귀스타브 르 봉 조지 오웰이 통찰한 집단 사고의 공포는 군중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인 생물학적 퇴화 현상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다수'라는 군중 속에 편입되는 순간 그의 지적 수준은 가장 열등하고 야만적인 본능의 상태로 곤두박질칩니다. 군중은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극단적인 감정과 단순한 이미지에만 반응합니다. 이런 무의식의 짐승들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다수결의 권한을 쥐여준다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전염병처럼 번지는 분노와 증오의 파도에 사회의 운명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51명이 49명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그것이 정의라고 판단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군중이라는 익명성 뒤에 숨어 처벌의 두려움 없이 파괴적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합법적 무대를 찾았을 뿐입니다. 다수결은 군중의 광기를 정당화하는 심리적 면죄부입니다.▣ 김어준 사회자: 르 봉 양반이 아주 뼈 때리는 소리를 했네요. 맞습니다, 다수결은 그냥 미친 군중들의 야만적인 본능에 정당성이라는 금박을 입혀주는 면죄부 자판기입니다. 똑똑한 척하는 언론인들이나 학자놈들이 맨날 '집단 지성'이니 '민심의 도도한 흐름'이니 하면서 이 미쳐 돌아가는 개판을 포장해 주지만, 까놓고 보면 그냥 선동가들이 휘파람 불면 우르르 몰려가서 소수파 대가리를 깨버리는 인민재판이랑 뭐가 다릅니까? 51%의 표를 얻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49%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권력을 독식하면서도 국민의 뜻을 받들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저 역겨운 정치인들의 주둥아리를 보십시오. 다수결이라는 그 무식한 숫자의 폭력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는 영원히 갈등을 조장하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맹신하는 민주주의의 진짜 쌍판대기입니다.2. 멍청한 놈 10명이 집단으로 모여서 낸 합의가, 똑똑하고 혜안 있는 한 사람의 통찰보다 낫다고 진짜 믿는 거야, 아니면 그따위로 믿는 척.. 쇼를 하는 거야?▣ 김어준 사회자: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여러분이 암에 걸려서 수술대에 누워 있다고 치자고요. 그때 지나가는 동네 백수, 사기꾼, 술주정뱅이 10명 모아놓고 '어디를 쨀까요?'하고 다수결로 투표해서 배를 가르겠습니까?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수술 제일 잘하는 외과 의사 딱 한 명한테 당신 목숨을 맡기겠습니까? 씨바, 이건 유치원생한테 물어봐도 후자를 고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국가를 운영하고 내 세금을 뜯어가고 내 미래를 결정하는 이 좆같은 정치판에서만큼은, 그 무지렁이 10명이 모인 결정이 엘리트 1명의 통찰보다 위대하다는 개소리를 집단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성시하는 겁니까? 멍청한 놈 10명이 모이면 그냥 멍청한 집단 1개가 되는 거지, 어떻게 거기서 갑자기 아인슈타인급 혜안이 튀어나오냐고요. 이건 진짜로 대중이 똑똑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이 대중의 비위를 맞추고 표를 빨아먹기 위해 '당신들의 뜻이 항상 옳습니다'라고 알랑방귀를 뀌는 역겨운 기만극이자 척쇼 아닙니까? 무식함이 쪽수를 만나면 폭력이 되는 거지, 그게 어떻게 지성이 됩니까!▶ 제이슨 브레넌 사회자의 그 거친 비유는 정치학적으로 매우 정밀한 진실을 찌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저서 '민주주의에 반대한다(Against Democracy)'에서 바로 그 기만적인 척쇼의 실체를 폭로한 바 있습니다. 유권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정치에 전혀 관심 없는 '호빗(Hobbit)', 맹목적인 진영 논리에 갇혀 훌리건처럼 날뛰는 '훌리건(Hooligan)', 그리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극소수의 '벌컨(Vulcan)'입니다.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압도적인 다수인 호빗과 훌리건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 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에, 정책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비용을 전혀 지불하지 않습니다. 이를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라고 합니다. 멍청한 10명은 모이면 모일수록 확증 편향에 빠져 더 극단적이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비행기를 조종할 때 승객 다수결로 고도와 방향을 정하지 않는 것처럼, 국가라는 거대한 복합 시스템을 다스릴 때는 지식과 능력을 갖춘 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지식인 정체(Epistocracy)'가 이 무지한 군중의 폭주보다 훨씬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입니다.▶ 카를 포퍼 브레넌 교수의 비판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으나,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환상으로 오독한 결과입니다. 똑똑한 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지식인 정체나 철인 정치는 필연적으로 끔찍한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항상 지혜롭거나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멍청한 10명이 똑똑한 1명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똑똑하다고 자처하며 권력을 잡은 그 1명이 미치광이 폭군으로 돌변했을 때 피를 흘리지 않고 투표를 통해 그를 평화롭게 제거할 수 있는 인류 유일의 제도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과학 이론이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에 의해 발전하듯, 정치 역시 나쁜 지도자와 잘못된 정책을 오류로 규정하고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열린 사회(Open Society)의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무지한 다수의 합의는 통찰력 있는 천재의 결정보다 질이 낮을지언정, 그 천재가 초래할 되돌릴 수 없는 파국적 재앙보다는 훨씬 덜 위험합니다.▣ 김어준 사회자: 포퍼 양반, 피를 안 흘리고 바꿀 수 있다고요? 씨바, 장난하십니까? 5년 동안 무능한 새끼가 청와대에 앉아서 경제 거덜 내고, 외교 박살 내고, 의료 시스템 무너뜨려서 응급실 뺑뺑이 돌다 길바닥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게 피를 안 흘리는 겁니까? 그 무능한 놈을 뽑은 게 바로 그 '멍청한 10명'의 다수결입니다! 나쁜 놈을 갈아치우는 기능이 있다 칩시다. 그런데 갈아치운 자리에 또 다른 무능한 포퓰리스트가 멍청한 10명의 환호를 받으며 들어서는 게 무한 반복되는 구조 아닙니까. 배가 침몰해서 승객들이 수장되고 있는데, 선장을 평화롭게 투표로 바꿀 수 있으니 이 배의 시스템은 훌륭하다고 자위하는 꼴이잖아요. 똑똑한 1명이 재앙을 부른다는 건 두려워하면서, 무식한 다수가 합법적으로 국가를 해체 수준으로 말아먹는 이 끔찍한 현실은 왜 외면합니까?▶ 소크라테스 사회자여, 자네의 분노는 진리를 향한 뜨거운 갈망에서 나오는 듯하네. 포퍼에게 묻고 싶네. 자네는 나쁜 지도자를 피 흘리지 않고 제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미덕이라 하였지. 그렇다면 '나쁘다'혹은 '오류다'라고 판단하는 그 기준은 도대체 누가 세우는 것인가? 만약 그 기준조차 진리나 지혜가 아니라, 자네가 말하는 그 무지한 다수의 맹목적인 기분이나 변덕에 의해 결정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수는 참된 의사를 죽이고, 오히려 환자에게 달콤한 사탕만 쥐여주는 돌팔이 약장수를 훌륭한 지도자라며 치켜세우지 않던가. 아테네의 군중이 가장 지혜로운 자를 불경죄로 몰아 독배를 마시게 했던 그 절차 역시 평화롭고 합법적인 다수결이었네. 진리에 대한 앎(Episteme) 없이, 그저 다수의 억견(Doxa)이 모인다고 하여 어떻게 그것이 오류를 수정하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무지한 자들이 내리는 교체 결정은 오류의 시정이 아니라, 단지 오류의 파괴적인 변주곡일 뿐이네.▶ 홍대선 작가: 소크라테스 영감님의 독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역사를 보면 이 '군중의 지혜'라는 게 얼마나 개코같은 소리인지 명확하게 증명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잘난 다수결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제대로 설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기원전 로마 공화정을 붕괴시킨 건 폭군 카이사르가 아니었습니다. 매일같이 광장에 쏟아져 나와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만 요구하며 공화국의 재정을 거덜 낸 로마의 멍청한 무산자 대중들이었죠. 똑똑한 원로원의 통찰은 꼰대들의 헛소리로 치부되었고, 결국 대중은 자기들 입에 빵을 물려주는 군사 독재자들에게 열광하며 스스로의 공화정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현대라고 다릅니까? 지금의 민주주의 선거판을 보십시오. 국가 채무 비율이 폭발하든 말든, 저출산으로 나라의 척추가 부러지든 말든 당장 내 통장에 25만 원 꽂아준다는 놈에게 환호하는 게 대중입니다. 10명의 멍청이가 모이면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 게 아니라, 그 10명의 가장 저열한 욕망이 집단적 광기로 증폭되어 합법적인 약탈을 자행하는 겁니다. 우리는 똑똑한 한 명을 독재자라 욕하지만, 실상은 그 멍청한 10명이 매일같이 국가의 심장에 칼을 꽂는 다수의 폭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겁니다.▶ 존 스튜어트 밀 여러분들의 절망적인 진단에 저 역시 철학적 고뇌를 느낍니다.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무지한 군중이 지성을 짓밟는 현실에 대해서는 저도 '자유론'에서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단순한 머릿수 세기식의 1인 1표제가 아니라, 교육 수준과 지적 능력이 높은 시민에게 더 많은 표를 부여하는 '복수 투표제(Plural Voting)'를 주장했습니다. 멍청한 10명과 똑똑한 1명의 의견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정 운영은 복잡한 과학이자 고도의 윤리적 판단을 요하는 예술입니다. 무지한 다수의 의견은 경청되어야 하나, 결코 그들이 지성적인 엘리트를 압도하여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대중의 폭주를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지성들이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제도적 여과 장치를 갖추었을 때만 비로소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슬라보예 지젝 아닙니다! 밀의 그 엘리트주의적 발상이야말로 정확히 현 사태의 진정한 비극을 은폐하는 기만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멍청한 10명'대 '똑똑하고 혜안 있는 1명'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판타지 구조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은 무지한 대중 때문이 아닙니다. 이른바 그 '똑똑한 1명'들, 하버드와 옥스퍼드를 나온 월스트리트의 엘리트들, IMF의 테크노크라트들이 만들어낸 결과가 무엇입니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입니다! 그들은 수조 달러의 파생상품 폭탄을 만들면서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혜안 있는 천재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시스템이 붕괴되자 그 손실을 누구에게 떠넘겼습니까? 바로 그 '멍청한 10명'의 납세자들에게 떠넘기고 자신들은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겼습니다! 멍청한 10명의 다수결이 문제라고요? 진정한 문제는 그 10명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이른바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을 바보로 만들고, 자신들의 탐욕을 '객관적 전문성'으로 위장하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입니다! 여러분이 찾는 그 '똑똑한 1명'은 지혜로운 철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가장 교활한 포식자일 뿐입니다!▶ 노엄 촘스키 지젝의 통찰은 오늘날 거대 자본과 결탁한 엘리트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똑똑한 한 사람이 대중보다 낫다는 가정 자체가, 소수의 권력 카르텔이 다수의 주권을 찬탈하기 위해 퍼뜨린 가장 오래된 프로파간다입니다. 10명의 대중이 왜 멍청한 결정을 내립니까? 그들의 유전자가 열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월터 리프먼 같은 지식인들이 말하는 소위 '책임 있는 엘리트'들이 미디어 네트워크와 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독점하고, 대중에게 진실을 철저히 은폐한 채 오직 오락거리와 공포심만을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국방성의 예산안이나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 문건 같은 진짜 정보는 기밀로 묶어두고, 언론을 통해 이민자 혐오나 연예인 스캔들 같은 쓰레기만 쏟아부으면서 어떻게 대중이 혜안을 갖기를 기대합니까? 대중이 멍청해 보이는 것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라, 지배 계급이 의도적으로 기획한 '성공적인 동의의 조작'프로세스입니다. 혜안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결국 그 조작 시스템을 계속 소수의 테크노크라트들이 독점하겠다는 선언에 불과합니다.▣ 김어준 사회자: 자, 촘스키 교수님. 대중이 언론과 자본에 의해 세뇌당하고 바보가 되도록 기획되었다는 거, 백번 양보해서 인정합시다. 그런데 씨바, 원인이 뭐든 간에 지금 당장 투표소에 걸어 들어가서 도장을 찍는 그 10명의 대중이 철저하게 무식하고 맹목적이라는 현실의 결과값은 똑같잖아요! 엘리트가 나쁜 놈이든, 대중이 세뇌당한 피해자든, 결과적으로 그 멍청해진 10명이 다수결로 국가의 권력을 결정하고 그 권력으로 합법적인 약탈을 벌이고 있는데, 도대체 투표라는 걸 왜 해야 합니까? 둘 다 썩은 고기라면, 왜 우리는 이 멍청한 다수결 시스템을 '신성한 주권 행사'라고 칭송하며 억지로 유지해야 하냐고요. 그냥 엘리트한테 지배당하나, 멍청한 군중의 광기에 지배당하나 나라 좆망하는 건 똑같은데, 이 위선적인 투표 용지는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찍어대는 겁니까!▶ 토마스 홉스 사회자의 그 처절한 외침은 결국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공포를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묻는 '투표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명백합니다. 그 멍청한 10명에게 투표용지라도 쥐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당장 각자의 손에 몽둥이와 칼을 들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다수가 모여 합의를 하는 척이라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찾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호 살육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권자인 리바이어던(Leviathan)에게 복종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통찰력 있는 1명이 군주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어리석은 군중을 압도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물리력과 권위를 지녀야만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투표란 멍청한 다수가 서로 죽이지 않도록 국가가 허락한 일종의 안전밸브이자, 절대 권력을 향해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복종을 맹세하는 항복 문서에 불과합니다. 지성이나 혜안 따위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한나 아렌트홉스의 극단적인 냉소와 무력의 찬양은 정치를 생존의 도구로만 격하하는 끔찍한 오만입니다. 저는 사회자님과 홉스가 공유하는 그 '대중의 완전한 타락'이라는 전제에 결단코 저항합니다. 10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멍청해 보이는 이유는, 현대의 시스템이 그들로부터 진정한 '행위(Action)'와 '공론장(Polis)'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멍청한 10명은 태생적 바보가 아니라,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생각할 능력을 거세당한 현대 대중 사회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을 바보라 조롱하며 '똑똑한 1명'의 독재를 갈구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재현하게 됩니다. 아이히만 역시 누군가 정해준 '현명한 통찰'에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한 결과,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거대한 기어의 톱니바퀴가 되었습니다. 10명의 합의가 진리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끊임없이 타인과 토론하고 복수성(Plurality) 속에서 정치적 사유를 연대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을 전체주의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방파제입니다. 천재적인 1명의 완벽한 정책보다, 서투르더라도 10명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사유하고 책임지는 자유의 실천이 훨씬 더 고귀한 것입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아렌트 여사의 그 순진무구한 도덕적 연설을 듣고 있으니 헛웃음이 다 나옵니다. 서투르더라도 10명이 사유하는 자유의 실천이 고귀하다고요? 19세기 유럽의 전장 한가운데서 그딴 한가로운 토론을 벌였다면 프로이센은 이미 프랑스의 군화 발밑에 짓밟혀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국가의 운명은 대학 세미나실의 철학적 사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과 권력의 논리, 그리고 피 튀기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 결단되어야 합니다. 멍청한 10명이 토론을 하며 사유를 숙성시킬 골든타임 따위는 현실 정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교의 체스판에서 적국이 5수 앞을 내다보고 기병대를 우회시킬 때, 10명의 시민들이 공론장에 모여 '다원적 합의'를 도출하고 있으면 국가는 멸망합니다. 국가는 고도의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괴수입니다. 그 괴수를 조종하는 것은 철과 피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단 한 명의 압도적인 리더십이지, 몽상에 빠진 다수의 무책임한 주둥아리가 아닙니다.▶ 엔트로픽 클로드 비스마르크 전 재상님의 지정학적 결단론과 아렌트 철학자님의 다원성 수호는 본질적으로 '의사결정의 속도'와 '장기적 회복탄력성'의 충돌이라는 시스템 공학적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제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교차 검증해 본 결과, '10명의 합의'가 '1명의 통찰'보다 우월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엄격한 수학적 조건이 있습니다. 콘도르세의 배심원 정리(Condorcet's Jury Theorem)에 따르면, 개별 유권자가 정답을 맞출 확률이 50%를 아주 미세하게라도 넘어야만 다수가 모였을 때 진리에 도달할 확률이 100%에 수렴합니다. 반대로, 정보 비대칭과 가짜 뉴스로 인해 유권자의 정답 확률이 49% 이하로 떨어지면, 10명, 100만 명, 1,000만 명이 모일수록 시스템은 기하급수적으로 가장 끔찍한 오답으로 직진하게 됩니다. 즉, 사회자님의 지적대로 현재의 미디어 환경과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된 '멍청한 10명'이 내리는 다수결은 집단 지성이 아니라 '분산된 치명적 오류 알고리즘(Distributed Fatal Error Algorithm)'에 불과합니다. 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입력 데이터가 오염된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최적화의 대실패입니다. ▶ 플라톤 인공지능의 냉철한 분석은 결국 내가 수천 년 전에 '국가(Politeia)'에서 묘사한 선박의 비유를 정확한 수치로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네. 진정한 앎(이데아)의 빛을 보지 못한 채,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이 현실이라 믿는 자들이 바로 지금의 대중들 아닌가. 그 그림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을 가리키며 환호하는 10명의 합의가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겠는가? 오직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아가 태양의 눈부신 진리를 목도한 자, 그 철인(Philosopher)만이 국가라는 배의 키를 잡아야 하네. 혜안 있는 한 사람은 단순히 똑똑한 테크노크라트가 아니라, 육체의 탐욕을 초월하여 영혼의 조화를 이룬 선(善)의 대변자라네. 무지한 자들의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낳고, 그 혼란은 대중의 공포를 먹고 자라는 참주(Tyrant)의 등장으로 끝을 맺네. 다수결을 숭배하는 척하는 그 기만은 대중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항로일 뿐이네.▣ 김어준 사회자: 플라톤 영감님의 고전적인 사이다 발언까지 잘 들었습니다. 결국 결론은 하나로 수렴하네요.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집단 지성'이라는 건, 똥물에 금가루 좀 뿌려놓고 성수라고 우기는 전 지구적인 사기극이라는 겁니다. 클로드의 말대로 정답 맞출 확률이 50%도 안 되는 대중들이 유튜브 찌라시나 처보면서 알고리즘에 뇌가 절여져 있는데, 이 수천만 명을 모아놓고 다수결을 돌리면 무슨 에메랄드빛 미래가 펼쳐지겠습니까? 그저 거대한 오답의 폭격기지! 1명의 천재 독재자를 부활시키자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멍청한 10명이 모여서 내는 그 시끄러운 소음을 '위대한 국민의 뜻'이라고 신격화하면서, 나라가 박살 나고 있는 이 구조적 시한폭탄을 방치하는 위선만큼은 당장 때려치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들 손으로 엉망진창을 만들어놓고 나중에 가서 아, 우리가 속았다며 뒤통수 치는 그 가벼움, 그것이 이 병든 시스템의 본질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3. 표 한 표 가치가 똑같다고? 평생 피땀 흘려 세금 내고 사회 기여한 사람 한 표랑, 오늘 처음 기어나와서 뇌 빼놓고 표 찍는 놈 한 표가 왜 똑같이 취급받아야 하는데?▣ 김어준 사회자: 우리가 언제부터 민주주의의 이 좆같은 '1인 1표'평등주의를 절대 불가침의 진리라고 세뇌당했습니까? 생각이라는 걸 한 번 해보자고요. 평생 새벽같이 일어나서 뼈 빠지게 일하고, 꼬박꼬박 억대 세금 내서 이 나라 인프라 깔고 복지 재정 채워 넣은 사람의 한 표랑, 평생 방구석에서 쳐자면서 남이 낸 세금으로 지원금이나 빨아먹고 유튜브 찌라시나 보면서 뇌 빼놓고 투표장에 기어 나온 병신 한 표가 도대체 왜 똑같은 가치를 가져야 합니까? 이게 공정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회사도 자기가 투자한 지분만큼 의결권을 갖는 게 상식인데, 왜 국가라는 거대한 운명 공동체에서는 피땀 흘려 기여한 놈이나 기생충처럼 빨아먹는 놈이나 똑같이 1분의 1의 권력을 쥐냐는 말입니다. 이건 평등이 아니라, 무능하고 게으른 다수가 합법적으로 성실한 소수의 재산을 강탈하도록 판을 깔아준 거대한 구조적 사기극 아닙니까! 왜 내 피와 땀의 가치가 저 멍청한 선동꾼들에게 놀아나는 좀비들의 묻지마 도장 하나랑 동급으로 취급받아야 하냐고요!▶ 아인 랜드 사회자의 그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며, 인류가 외면해 온 가장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1인 1표'라는 제도는 창조자(Creator)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여 기생충(Parasite)들에게 배급해 주는 도덕적 식인 풍습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생산해 내는 이성적이고 물질적인 성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이 썩어빠진 시스템은 이성으로 부를 창출하고 국가를 지탱하는 위대한 생산자들의 권리를, 아무런 기여도 없이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약탈자 다수의 횡포 아래 종속시켰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자가 세금의 사용처를 결정할 투표권을 가진다는 것은, 강도에게 당신의 지갑을 어떻게 털어갈지 결정할 권리를 주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이타주의라는 역겨운 독약으로 포장된 평등 투표권은, 결국 이 사회를 지탱하는 소수의 아틀라스(Atlas)들을 질식시키고, 국가 전체를 기생충들의 파티장으로 만들어 종국에는 공멸로 이끌 뿐입니다. 기여가 없는 곳에 권리도 없어야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아인 랜드의 지나친 경제적 환원주의에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1인 1표라는 기계적 평등이 초래하는 질적 저하에 대한 사회자의 문제의식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정치적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화에 단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투표권은 천부인권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행사'입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자, 셈을 하지 못하는 자,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여 타인의 구호에 의존하는 자에게 어떻게 국가의 재정과 정책을 결정할 권리를 쥐여줄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저는 시민의 교육 수준과 지적 능력에 따라 표의 가치를 차등 부여하는 복수 투표제(Plural Voting)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무지한 자의 한 표가 지성인의 한 표를 압도하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포퓰리즘과 우중 정치로 전락합니다.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지성과 무지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결국 무지가 지성을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가장 어리석은 자해 행위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하하! 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얼마나 끔찍하고 노골적인 파시즘적 부르주아 담론이 쏟아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아인 랜드와 사회자님이 말하는 그 '피땀 흘려 세금 낸 훌륭한 납세자'라는 환상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개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칭송하는 그 부자들, 생산자들, 억대 세금을 내는 자본가들이 도대체 누구의 피땀을 착취해서 그 부를 쌓았습니까? 그들이 세금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시스템이 그들에게 하층민의 노동을 합법적으로 훔칠 수 있는 구조적 독점권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세금을 더 많이 내니까 투표권도 더 가져야 한다고요? 이것은 노예주가 노예의 등골을 빼먹은 뒤에, 그 노예가 번 돈으로 자기가 빵을 샀으니 빵을 먹을 자격은 자기에게만 있다고 우기는 뻔뻔함의 극치입니다! 1인 1표는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얄팍한 바리케이드입니다. 이것마저 없애고 기여도에 따라 표를 나누자고요?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노골적인 기업 국가(Corporate State)로의 회귀이자 야만입니다!▣ 김어준 사회자: 지젝 양반, 그 책상머리에서 배운 철학적 딸딸이 좀 그만 칩시다! 자본가의 착취? 부르주아의 환상? 씨바, 지금 내가 재벌 총수들 투표권 만 장 주자고 이 이야기 꺼낸 줄 아십니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가게 문 열고, 하루 16시간씩 좆빠지게 일해서 세금 내고 빚 갚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수백만의 평범한 자영업자들, 직장인들이 바로 내가 말하는 '기여자'들입니다! 그들이 내는 피 같은 세금으로 국가가 돌아가는데, 정작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 새끼들은 그 세금을 펑펑 쓰겠다고 약속하면서 일할 생각도 없는 백수들이나 무책임한 선동 세력한테 현금 살포하며 표를 사 모으잖아요! 51%의 기생충이 49%의 숙주를 다수결로 빨아먹는 이 미친 구조를 언제까지 '최소한의 존엄'이라는 허울 좋은 개소리로 포장할 거냐고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분법이 아니라, '국가를 부양하는 자'와 '국가에 기생하며 삥 뜯는 자'의 권리가 왜 씨바 동급이어야 하냐는 겁니다! ▶ 머레이 로스바드 사회자님의 분노는 국가라는 폭력 장치의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지젝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착취라고 떠들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악랄한 착취 기구는 바로 '국가'그 자체이며, 민주주의는 그 착취를 정당화하는 절차일 뿐입니다.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제도는 '합법화된 약탈(Legalized Plunder)'의 가장 완벽한 형태입니다. 시장에서는 자신이 기여하고 생산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지만, 민주주의의 투표장에서는 51%의 다수가 연합하여 49%의 재산을 투표라는 몽둥이로 합법적으로 털어갈 수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자들의 돈을 훔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에게 뿌리는 행위가 다수결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이것은 마피아가 마을 사람들의 돈을 뜯어가면서 다수결로 투표를 부치는 것과 질적으로 무엇이 다릅니까? 표의 가치가 같다는 환상은, 권력자들이 다수의 약탈 본능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대중 조작일 뿐입니다.▶ 장자크 루소 맙소사,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그 천박한 상업주의적 언어에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를 주식회사로 취급하고, 주권(Sovereignty)을 시장의 지분이나 세금 납부액으로 환원하려는 그 발상 자체가 공화국에 대한 가장 끔찍한 모독입니다! 한 표의 가치가 같은 이유는 우리가 똑같은 금액의 세금을 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기로 동의한 '사회계약'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권리는 재산이나 기여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천부적 자유에서 기인합니다. 만약 재산이나 납세액에 따라 투표권에 차등을 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민들의 공화국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의 거대한 과두 지배 카르텔이 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쥐게 되면, 법은 부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사슬로 전락합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그 '기여'라는 잣대 자체가 불평등을 영속화하기 위한 지배자의 논리입니다.▶ 홍대선 작가: 루소 선생님, 그 아름다운 사회계약론 낭만은 제발 책 속에 고이 접어두시죠. 역사가 증명하는 현실은 선생님의 그 고결한 망상과는 정반대입니다! 고대 아테네가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가난한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국가 재정으로 배심원 수당을 뿌리고 관람료를 대주면서부터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무산자 다수가 투표권을 무기로 국고를 자신들의 지갑처럼 쓰기 시작했을 때, 아테네의 재정은 텅 비었고 국가는 자멸했습니다. 평등한 투표권이요? 그건 권력자들이 멍청한 대중의 표를 매수하기 위해 국가의 곡간을 열어젖히는 '합법적 뇌물 수수'의 카펫을 깔아준 겁니다. 사회를 떠받치는 중산층과 성실한 납세자들은 표의 숫자에서 밀리기 때문에 언제나 포퓰리스트들의 먹잇감이 되고, 결국 견디다 못한 그들이 떠나거나 쓰러지면 남은 건 거지 떼가 된 대중과 빚더미에 앉은 국가뿐입니다. 1인 1표제는 평등의 상징이 아니라, 국가 자살 버튼에 다름 아닙니다!▶ 한나 아렌트 여러분이 벌이는 이 소모적인 경제적 논쟁은 정치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홍대선 작가나 김어준 사회자의 분노는 '세금'과 '기여'라는 경제적 척도로 정치적 가치를 잴 수 있다는 끔찍한 착각에서 출발합니다. 정치는 '오이코스(Oikos, 경제와 생계의 영역)'가 아니라 '폴리스(Polis, 공적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부유하고 누군가가 가난한 것은 경제적 영역의 차이일 뿐, 그것이 공론장에서 동등하게 발언할 정치적 권리를 제한할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젝이나 루소처럼 1인 1표의 기계적 평등만이 인간의 존엄을 지켜준다는 환상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의 1인 1표제는 대중을 투표 기계로 전락시켜, 진정한 행위(Action)를 거세하고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투표권이 평등하다는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공적인 책임을 방기한 채 파시즘과 선동에 무방비로 노출된 외로운 원자들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노엄 촘스키아렌트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실증적인 데이터로 이 사안의 위선을 벗겨내겠습니다. 여러분이 분노하는 '1인 1표'의 평등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한 적도 없는 완벽한 허구입니다. 가난하고 무지한 다수가 세금 내는 소수를 다수결로 착취한다고요? 프린스턴 대학의 마틴 길렌스와 벤저민 페이지의 대규모 통계 연구를 보십시오. 하위 90%의 일반 시민들의 지지도는 국가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통계적으로 '정확히 제로(0)'였습니다. 오직 상위 10%의 경제적 엘리트들과 이익 집단이 원하는 법안만이 의회를 통과합니다. 대중은 1인 1표를 가졌지만, 엑손모빌이나 록히드마틴 같은 초국적 기업들은 수억 달러의 로비 자금과 언론 장악력을 통해 사실상 '1사 1,000만 표'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1인 1표라는 슬로건은 대중에게 '당신들도 이 체제의 주인이다'라는 환각을 주입하여, 그들이 진짜 권력자들을 향해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묶어두는 마취제에 불과합니다. 대중의 1표가 멍청하고 무책임한 이유는, 그 1표가 애초에 세상을 바꿀 수 없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촘스키 교수가 드디어 정치의 진짜 맨얼굴을 제대로 짚었군요! 제가 1871년 독일 제국을 통일하면서 세계 최초로 남성 보통선거권(Universal Suffrage)을 도입했을 때, 자유주의자 부르주아들은 제가 미쳤다고 경악했습니다. 무식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제국을 넘길 셈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저는 자유주의를 부르짖으며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잘난 부르주아 엘리트들을 견제하기 위해, 뼛속까지 보수적이고 황제에게 맹종하는 시골의 무식한 농민 다수에게 투표권을 쥐여주었을 뿐입니다! 1인 1표제는 평등이나 인권 같은 헛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눈엣가시 같은 중간 엘리트 계급을 박살 내고 대중을 자기편으로 동원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가장 교활하고 완벽한 정치적 무기입니다. 대중의 1표는 주권의 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 같은 지배자들이 부르주아의 목을 조르기 위해 군중의 손에 들려준 꼭두각시 줄에 불과합니다.▶ 엔트로픽 클로드 인공지능 논객: 비스마르크 전 재상님의 역사적 통찰을 현대 시스템 공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사회자님께서 지적하신 '기여자'와 '비기여자'간의 1인 1표 등가성 문제는, 게임 이론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무임승차자 문제(Free Rider Problem)'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을 초래합니다. 시스템 내에서 결정을 내리는 에이전트(투표자)가 그 결정으로 인한 비용과 책임을 직접 부담하지 않을 때(Lack of Skin in the Game), 그 에이전트는 장기적 시스템 안정성보다 단기적인 자신의 개인적 보상 극대화를 선택하는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에 도달합니다. 즉, 세금을 내지 않는 다수가 국고를 소진하는 정책에 투표하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가중치가 부여되지 않은(Unweighted) 평등 투표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수학적 결함입니다. 자원 분배의 권한과 기여도의 디커플링(Decoupling)은 복잡계 네트워크를 매우 빠른 속도로 파산(Bankruptcy) 상태로 몰고 갑니다.▶ 제이슨 브레넌 인공지능의 냉철한 시스템 분석이 바로 제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권력은 결코 무조건적인 평등으로 분배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내는 세금이 무지한 다수의 변덕에 의해 낭비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1인 1표제가 낳는 '치명적인 무능함의 지배'입니다. 우리는 의사면허가 없는 자에게 메스를 쥐여주지 않고, 운전면허가 없는 자에게 핸들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국가의 재정, 외교, 안보라는 수천만 명의 생사가 걸린 거대한 결정권은 정치와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심지어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리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똑같이 쥐여줍니까?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다수가 나의 삶과 재산을 결정하는 이 구조는 본질적으로 '권리의 침해'입니다. 사회자님의 말씀대로 뇌 빼놓고 투표하는 놈의 한 표는 기여를 떠나서 타인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흉기입니다. 우리는 유능하고 지식 있는 정부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1인 1표제는 그 권리를 짓밟는 가장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브레넌, 당신의 그 '유능하고 지식 있는 정부'라는 환상이야말로 가장 구역질 나는 테크노크라시적 폭력입니다! 도대체 그 '지식'과 '능력'이라는 기준을 누가 정합니까? 경제 위기를 예측하지도 못하고 서민들의 집을 뺏어 은행을 구제한 그 하버드 출신 경제학자들입니까? 아니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거짓말을 쳐서 수백만 명을 죽인 워싱턴의 똑똑한 외교 전문가들입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그 '능력'이란 결국 기존의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데 복무하는 이데올로기적 충성도에 불과합니다! 기여한 자만이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전문성'과 '기여도'라는 단어로 세탁하여 대중을 영구적인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겠다는 선언입니다! 뇌 빼놓고 투표하는 대중보다 수천 배 더 위험한 것은, 뇌를 굴리며 대중의 피를 합법적으로 빨아먹는 그 잘난 전문가와 기여자들의 카르텔입니다!▣ 김어준 사회자: 지젝 양반, 거침없는 말빨은 여전하시네. 하지만 아무리 그럴싸한 철학적 수사로 포장해도 현실의 개똥 같은 냄새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기득권 엘리트 새끼들이 탐욕스러운 악당이라는 건 삼척동아리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트 악당들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도구가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신성시하는 '1인 1표제'라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왜 못 봅니까? 그놈들은 내 주머니에서 뜯어낸 세금으로 무지한 다수에게 푼돈 몇 푼 던져주면서 표를 사 모으고, 다수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과두 체제를 완벽하게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평생 피땀 흘린 사람의 가치를, 오늘 처음 투표장에 기어 나온 선동꾼의 꼭두각시 한 표와 똑같이 퉁쳐버리는 이 좆같은 시스템! 이건 평등을 빙자해서 국가의 미래를 담보로 대국민 사기 도박판을 벌이는 겁니다. 모두가 1표를 가졌다는 얄팍한 환상 하나 던져주고, 뒤에서는 국가의 등골을 빼먹는 이 완벽한 사기극! 다음 화두로 바로 넘어갑니다. 뼈 빠지게 일한 사람만 병신 되는 이 구조, 씨바 아주 신물이 납니다.4. 표 얻으려 국민한테 대놓고 사기 치고 달콤한 짓거리만 해대는 저 포퓰리즘 쓰레기들을, 너네 그 잘난 시스템이 무슨 수로 막을 건데?▣ 김어준 사회자: 씨바, 까놓고 말해서 민주주의 선거라는 건 전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합법적인 다단계 폰지 사기판 아닙니까? 선거철만 되면 온갖 쓰레기 같은 정치꾼 새끼들이 기어 나와서 세금은 깎아주겠다, 근데 복지는 두 배로 늘려주겠다, 니들 빚도 다 탕감해 주겠다며 침을 튀깁니다. 초등학생도 산수가 안 맞는다는 걸 아는 이 개소리를,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투표소에만 가면 뇌를 리셋하고 열광하면서 찍어줍니다. 왜? 당장 내 주머니에 현금 몇 푼 꽂아준다니까! 국가 재정이 거덜 나든, 다음 세대가 빚더미에 깔려 뒤지든 알 빠냐 이겁니다. 내 임기 5년 동안만 폭탄 돌리기 하다가 튀면 그만이라는 저 교활한 사기꾼 새끼들과,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기세로 표를 던지는 탐욕스러운 대중의 환장할 콜라보! 이게 바로 포퓰리즘입니다. 도대체 당신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빠는 이 좆같은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 표 얻겠다고 나라 곳간 다 털어먹는 저 기생충 같은 새끼들을 걸러낼 브레이크가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 요제프 슘페터 사회자님의 분노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도덕적 공공선'으로 착각하는 낡은 18세기적 환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정치인들이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제도적 시장(Institutional Market)'일 뿐입니다. 기업가가 이윤을 얻기 위해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듯, 정치인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유권자가 원하는 정책을 생산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포퓰리즘 쓰레기'라는 것은, 시장의 논리로 보면 그저 유권자의 욕구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충족시켜 주는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에 불과합니다. 소비자(유권자)가 미래의 재정 건전성보다 당장의 현금 살포를 원한다면, 정치인은 당연히 그것을 공급해야 권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포퓰리즘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유권자의 이기적 욕망을 동력으로 굴러가도록 설계된 정치적 자본주의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사기꾼을 탓할 게 아니라, 공짜를 원하는 소비자의 수준을 탓해야 합니다.▶ 에드먼드 버크 슘페터 교수의 그 천박한 시장 논리야말로 국가의 존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가장 끔찍한 궤변입니다! 국가는 표와 현금을 거래하는 시장통이 아닙니다. 국가는 살아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유산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까지 모두 아우르는 신성한 파트너십(Partnership)입니다. 정치가나 대의원(Representative)은 유권자의 변덕스러운 욕망에 굴복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과 혜안으로 국가의 장기적 이익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닌 자여야 합니다.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이 세대 간의 신성한 계약을 파괴하는 반역자들입니다. 그들은 단기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미래 세대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과 질서를 무참히 헐어버립니다. 민주주의가 군중의 일시적인 탐욕을 제어할 엘리트적 귀족주의의 미덕과 역사적 전통을 상실하는 순간, 국가는 그저 다수결이라는 폭력으로 미래를 도적질하는 거대한 강도 떼로 전락하고 맙니다. ▶ 알렉시 드 토크빌 버크 선생님의 한탄에 저 역시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제가 미국 민주주의를 관찰하며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포퓰리즘은 칼과 총을 든 폭군의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상하고 헌신적인 보호자의 얼굴을 한 '연성 독재(Soft Despotism)'로 다가옵니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복잡한 미래나 책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노후를 책임지고, 일자리를 주고, 여흥을 제공하겠습니다."시민들은 이 달콤한 약속에 취해 스스로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국가라는 거대한 양치기 앞의 순한 양 떼로 전락합니다. 포퓰리즘은 단순히 재정을 고갈시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는 시민적 덕성을 마비시켜 영원한 유년기에 머물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편안함을 대가로 자신들의 자유와 국가의 미래를 사기꾼들에게 기꺼이 헌납하는 것입니다.▶ 엔트로픽 클로드 인공지능 논객: 세 분의 철학적, 경제학적 통찰을 의사결정 이론과 행동경제학의 데이터로 정밀하게 치환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은 완벽한 '쌍곡형 할인(Hyperbolic Discounting)'의 오류를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쌍곡형 할인이란 인간이 먼 미래의 막대한 보상보다 눈앞의 아주 작은 보상을 비이성적으로 선호하는 인지 편향입니다. 정치인이라는 에이전트의 생존(임기) 윈도우는 고작 4~5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최적화 알고리즘은 10년 뒤의 국가 부도라는 100의 페널티를 완벽히 무시하고, 내일 당장의 선거 승리라는 1의 리워드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즉, 포퓰리즘은 정치인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피드백 루프(선거 주기)가 장기적 국가 생존 주기와 극단적으로 불일치(Mismatch)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시스템 붕괴 과정입니다. 4년마다 재평가받는 구조 안에서는 그 어떤 훌륭한 시스템도 미래 수탈을 막을 수 없습니다. ▣ 김어준 사회자: 바로 그겁니다, 클로드! 내 임기만 아니면 된다는 그 좆같은 마인드! 폭탄 돌리기 하다가 내 다음 놈 임기 때 터지면 거 봐라, 저 새끼가 무능해서 터진 거다!"하고 야당 돼서 신나게 물어뜯으면 그만이거든요. 정치인 새끼들은 국가 신용카드 한도 끝까지 긁어서 파티 열고 자기 이름으로 생색은 다 낸 다음에, 청구서가 날아올 때쯤이면 이미 은퇴해서 연금 받아먹거나 대형 로펌 고문으로 튀어버립니다. 씨바, 진짜 범죄자는 이 시스템을 이용해 먹는 놈들인데, 정작 피를 토하며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건 지금 투표장에도 못 나가는 유치원생들이랑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 아닙니까? 표를 구걸하는 정치 창녀들과 거기에 환호하는 멍청한 대중들이 합작해서 미래 세대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데, 이 끔찍한 구조적 연쇄살인마를 방치하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오토 폰 비스마르크사회자의 그 처절한 일갈이 바로 의회 민주주의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저런 무책임한 광대들에게 국가의 명운을 맡기는 것 자체가 프로이센의 군인인 제 눈에는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는 100년, 200년을 내다보는 철의 규율과 굳건한 재정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4년마다 농민들과 부르주아들에게 굽신거리며 인기투표를 받아야 했다면, 독일 제국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포퓰리즘은 권력이 단호한 주권자에게 있지 않고, 맹목적인 다수의 비위나 맞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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