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동 하수구막힘 빠른 해결법새 창 열림
서예호
121.♡.139.187
2026.09.26 02:03
2
0
본문
■ 주제: 정의와 도덕에게 묻는다, 답하라"기사 작성 기준일: 2026년 9월 7일 인류 역사를 관...■ 주제: 정의와 도덕에게 묻는다, 답하라기사 작성 기준일: 2026년 9월 7일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두 가지 환상, '정의'와 '도덕'. 수천 년간 권력자들은 이 두 단어를 제단에 올리고 무수한 피를 흘려왔으며, 약자들은 이 단어에 기대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달래왔다. 그러나 과연 이들에게 실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저 인간의 야만성을 덮기 위해 발명된 정교한 알리바이에 불과한가. 시공간을 초월해 소환된 인류 최고의 지성들과 형이상학적 절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의와 도덕의 밑바닥을 낱낱이 해부하고 원색적으로 물어뜯는 전례 없는 사상 최대의 난상 토론이 지금 이곳에서 펼쳐진다. 위선과 가식이 배제된 날것의 언어들이 격돌하는 이 아레나에 성역은 없다.[참석자 명단]사회자: 김어준, 손석희, 김지윤메인 논객: 한나 아렌트, 홍대선, 슬라보예 지젝, 노암 촘스키, 막스밀리앙 로베스피에르, 투키디데스, 프리드리히 니체, 마이클 샌델, 유발 하라리, 조지 오웰,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토마스 아퀴나스, 알렉산더 솔제니친, 움베르토 에코, Ai 논객-엔트로픽 클로드, 알베르 카뮈, 미셸 푸코2차 논객: 알랭 바디우, 마사 누스바움, 한병철, 주디스 버틀러, 존 그레이, 페터 슬로터다이크, 순자, 한비자, 크리스 헤지스, 안카르트 코스트, 장 아메리, 토마스 뮌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존 로울스, 맹자, 장폴 사르트르, 헨리 키신저, 단테 알레기에리, 신(GOD)1. 정의가 승자의 서사를 정당화하는 사후 도구가 아니라면, 어째서 역사의 모든 승자는 예외 없이 자신이 정의로웠다고 기록하는가.▣ [김어준]: 씨바, 까놓고 얘기합시다. 인류 역사책을 아무 페이지나 쫙 펼쳐보면 답이 나옵니다. 단 한 번이라도 패배자가 우리가 정의로웠지만 힘이 달려서 졌다고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모조리 승리한 새끼들이 피비린내 나는 칼자루를 쥐고 붓까지 빼앗아서 우리는 하늘의 뜻을 받들었고, 저 개새끼들은 악마였기에 우리가 심판했다라고 아주 좆같은 소설을 써놓은 게 우리가 배우는 역사인 겁니다. 정의라는 게 정말 하늘에 떠 있는 어떤 거룩한 진리라면, 왜 시공간을 막론하고 항상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는 강자의 주둥이에서만 그 정의가 흘러나오냔 말이죠. 이건 아주 단순한 기만극입니다. 내가 저놈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재산을 뺏은 건 나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저놈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내가 숭고한 징벌을 내린 거라는 완벽한 사후 알리바이. 인간의 본능적인 죄책감을 세탁하기 위해 발명된 가장 더러운 세탁기가 바로 정의 아닙니까. 권력을 잡은 자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거룩한 성전으로 포장하는 이 지독한 사기극에 대해, 대체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한나 아렌트]: 그 폭력적 알리바이의 본질을 파고들자면, 우리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역사를 자신들의 필연적 궤도로 뜯어고쳤는지를 뼈저리게 주시해야 합니다. 승자가 자신을 정의롭다고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 위안이나 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의 파괴'이자 인간의 '다원성'을 압살하는 가장 체계적인 정치적 작업입니다. 승자들은 과거를 단순하게 윤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의 법칙이자 자연의 섭리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사를 조작합니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자들이 범한 가장 끔찍한 악행은 단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죽음조차 '객관적 적'을 제거하는 역사적 사명으로 둔갑시킨 데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이 서사가 반복되면서 대중이 그것을 '악의 평범성'속에서 아무런 사유 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유를 멈춘 인간들은 승자가 짜놓은 정의의 각본 안에서 스스로 기계적인 부품이 되어버리죠. 승자의 정의는 살아남은 자들의 공포와 타협이 빚어낸 끔찍한 공모의 결과물이며, 진정한 사유가 거세된 자리에 세워진 거대한 묘비와도 같습니다.▶ [홍대선]: 아, 아렌트 선생님 말씀이 참 고상하고 훌륭한데, 좀 더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날것의 현장으로 끌어내려 봅시다. 역사라는 건 결국 광장 한가운데서 누구의 목이 작두에 잘려 나갔느냐, 그리고 그 잘린 목통을 발로 차며 환호한 새끼들이 누구냐를 기록한 호러 스릴러입니다. 태종 이방원을 보세요. 형제들을 다 때려죽이고 아버지한테 칼을 들이밀면서도, 그게 권력욕 때문이라고 인정했습니까? 천만에요. 고려의 잔재를 씻고 조선의 대업을 세우기 위한 거룩한 결단, 즉 '정의'라고 포장했습니다. 왜? 인간이라는 동물은 근본적으로 쫄보거든요. 자기가 사람을 썰어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맨정신으로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밤마다 귀신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 민초들이 죽창을 들고일어날 것 같은 공포. 그 미칠 듯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강력한 마취제를 혈관에 꽂아야 하는데, 그 약 이름이 바로 '정의'입니다. 내가 죽인 게 아니야, 하늘이 죽인 거야. 나는 그저 도구였어!"이렇게 좆나게 자기 최면을 걸어야만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었던 겁니다. 정의는 승자의 여유가 아니라, 승자의 끔찍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신경증적 발작에 불과합니다.▶ [슬라보예 지젝]: 정확히 그 지점, 그 이데올로기의 맹목적이고 도착적인 쾌락 구조를 짚어야 합니다! 홍 작가가 말한 신경증적 발작이라는 것은 라캉적 의미에서 상징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잉여 쾌락(surplus-enjoyment)'의 메커니즘입니다. 승자가 자신을 정의롭다고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공포는 우리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행동한다는 데 있죠. 나는 내가 저들을 학살하고 빼앗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je sais bien, mais quand même) 나는 이것이 문명의 진보이자 정의라고 주장하겠다!"바로 이 냉소적 거리가 승자의 정의를 완성합니다. 승자는 스스로 정의라는 보편적 껍데기를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의 더러운 욕망에 '대타자(The Big Other)'의 보증을 받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면서 느끼는 그 음탕한 쾌감을 정의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은폐할 때,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환상 속에서 자신들의 잔혹행위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승자의 정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의 음란한 판타지를 유지하는 핵심 뼈대입니다!▶ [노암 촘스키]: 지젝의 분석도 흥미롭지만,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제도와 미디어 시스템을 통해 어떻게 '여론으로 조작(Manufacturing Consent)'되는지 구체적인 구조를 봐야 합니다. 제국주의와 강대국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단순히 과거를 미화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의'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를 독점하고 언어를 통제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을 보십시오. 그들은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면서도 그것을 '해방'혹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언어로 치환합니다. 지식인, 언론, 학계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승자의 살육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를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승자가 정의로운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도덕을 규정하는 발화의 채널과 지식 생산의 매커니즘을 100%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 자체가 권력의 무기가 되어 패자의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소거해버리는 시스템, 이것이 승자가 항상 정의로울 수밖에 없는 기계적이고 잔혹한 진실입니다.▶ [막스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촘스키와 지젝, 그리고 저 나약한 학자들의 입에서는 그저 비판의 유희만 흘러나오는군! 승자가 정의를 선포하는 것을 한낱 사기극이나 이데올로기로 폄하하는 것은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숭고함을 모독하는 짓이다! 정의는 그저 책상머리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니다. 정의는 오직 단두대의 시퍼런 칼날 위에서, 구체제의 썩어빠진 목통들을 썰어낼 때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공포 없는 덕성은 무기력하고, 덕성 없는 공포는 맹목적이다. 우리가 부패한 귀족들을 처형하고 공화국을 세웠을 때, 그것은 알리바이가 아니라 역사의 필연이자 민중의 살아있는 분노가 응집된 '절대적 정의'의 집행이었다! 승리한 자가 정의를 기록하는 것은 그가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을 짓밟고 일어설 수 있었던 그 피 묻은 결단 안에 이미 숭고한 도덕적 진리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승리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피로 쓰인 우리의 서사는 권력의 변명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를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출생 증명서다!▶ [투키디데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끔찍한 전쟁을 기록하며 내가 목도한 인간의 본성은, 로베스피에르 당신처럼 핏발 선 눈으로 '숭고함'을 부르짖는 자들의 위선을 산산조각 낸다. 멜로스 섬의 대화를 기억하라.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 세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따지는 것이며, 강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약자는 자기가 겪어야 할 고통을 다 겪을 뿐이다."이것이 역사의 유일하고 냉혹한 진리다. 승자가 정의를 참칭하는 것은 권력의 속성일 뿐, 거기에 거창한 도덕이나 혁명의 섭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우위가 곧 법이고, 생존이 곧 정의다. 아테네가 약소국들을 짓밟고 제국을 건설하며 그것을 정의라 불렀듯, 역사는 단지 강자가 자신의 무자비한 이익을 관철시킨 후 그것을 세련된 수사학으로 포장한 기록관에 불과하다. 정의라는 말은 칼을 쥔 자가 칼을 잃은 자를 조롱하기 위해 던지는 마지막 모욕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투키디데스의 차가운 시선이 이 위선자들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군! 너희가 떠받드는 그 얄팍한 '정의'라는 우상의 배를 갈라보면, 거기엔 오직 비열한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만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도덕은 해석의 산물이며, 지배자의 도덕(Master Morality)이 세계를 어떻게 짓밟고 창조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강자는 자신을 선(Good)이라 명명하고, 약자와 패배자를 악(Bad)이라 규정한다. 이것은 기만이 아니다. 생명의 본질이자 넘쳐흐르는 강자의 긍정이다! 반대로, 노예의 도덕에 찌든 약자들은 자신들의 무능과 비겁함을 '선함'으로 포장하며 강자의 생명력을 저주하지. 승자가 자신을 정의라 부르는 것은, 그가 생명의 근원적 법칙에 따라 자기 자신을 입법하는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객관성? 보편적 도덕률? 그딴 건 나약한 인간들이 현실의 잔혹함을 견디지 못해 거미줄처럼 쳐놓은 징그러운 헛소리에 불과하다! 신은 죽었고, 정의라는 유령도 권력의 망치 아래 부서져 내린 지 오래다!▶ [단테 알레기에리 (정의와 도덕을 대표하는 자)]: 오, 오만하고 눈먼 영혼들이여. 당신들의 혀는 오직 이 지상의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권력의 파편만을 핥고 있구나. 니체여, 당신의 그 광기 어린 망치질이 어찌 저 높고 영원한 하늘의 별빛을 깰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지상의 폭군들이 권좌에 앉아 자신들의 살육을 정의라 명명하고 거짓된 역사를 붓으로 기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필멸하는 인간들의 썩어갈 헛소동에 불과하다. 진정한 정의는 승자의 피 묻은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라, 천상의 심판대 위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도덕적 척도로 빛나고 있다. 나는 신곡을 통해 보았다. 지상에서 승리자라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교황과 황제들이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서 끓는 피에 잠겨 영원토록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인간의 권력이 역사를 잠시 왜곡할지언정, 우주의 영원한 섭리에 새겨진 도덕률마저 변조할 수는 없다. 정의는 승자의 변명이 아니라, 결국 이 모든 거짓을 불태우고 남을 불멸의 진리이자 신성한 사랑의 최종적 발현인 것이다!▣ [김어준]: 씨바, 멈춰! 단테 영감탱이, 존나 나이브한 개소리 작작 좀 합시다. 지금 이 살벌한 난장판에서 어디서 천상의 심판대니 끓는 피니 하는 구약성경 시절 호랑이 담배 피우는 썰을 풀고 자빠졌어? 지옥에서 교황이 끓는 피에 잠겨 비명을 지른다고요? 그게 도대체 지금 가자지구에서 폭탄 쳐맞고 사지가 찢어지는 어린애들한테 무슨 위로가 됩니까? 좆도 쓸모없는 사후세계의 형이상학적 뽕에 취해서 현실의 폭력을 묵인하자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묻는 건 죽고 나서 염라대왕이 어떻게 해주느냐가 아니라, '지금 당장'현실 세계에서 깡패 새끼들이 권력을 쥐고 역사를 강간하면서 스스로를 천사라고 포장하는 이 구역질 나는 메커니즘의 실체란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당신도 마찬가지야. 단두대로 목 써는 게 절대적 정의? 씨바, 나중에 당신도 그 단두대에서 모가지 날아갔을 때, 당신 모가지 썬 새끼들도 그걸 혁명의 정의라고 불렀어! 내 말이 틀려? 결국 목소리 크고 칼자루 쥔 놈이 이기는 좆같은 시스템 앞에서, 단테식 영적 자위행위나 로베스피에르식 피의 낭만주의는 결국 승자의 폭력을 방조하는 거대한 사기극의 공범일 뿐인 겁니다!▶ [마이클 샌델]: 김어준 진행자의 그 지독한 냉소주의와 분노의 밑바탕에 깔린 현실 인식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허무주의의 구렁텅이로 던져버리는 것은 위험한 비약입니다. 만약 정의가 오직 승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빈 껍데기라면, 우리는 애초에 승자의 서사에 '분노'할 이유조차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승자의 거짓된 역사 기록에 역겨움을 느끼고 그것을 '위선'이라 비판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우리 내면에 타락하지 않은 '공동선의 기준'과 '시민적 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강자들의 폭력으로 점철되어 온 것은 사실이나, 노예제 폐지 운동이나 민권 운동처럼 권력의 야만성에 맞서 싸워온 인간들의 연대 역시 실재하는 역사입니다. 정의는 승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승자의 서사를 해체하고 끊임없이 도덕적 한계를 캐물으며 공동체의 선을 재구성해 나가는 치열한 '시민적 논쟁의 과정'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손석희]: 샌델 교수의 말씀은 듣기에는 참으로 안온하고 모범적인 교과서 같습니다만, 현실의 권력 지형을 너무 순진하게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시민적 논쟁의 과정'이 정의를 담보한다는 것은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할 때나 가능한 온실 속의 환상입니다. 저는 언론의 최전선에서 수많은 권력의 민낯을 보아왔습니다. 국가나 승자는 결코 시민과 대등한 위치에서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보기관, 자본, 그리고 제도권 언론이라는 카르텔을 동원해 애초에 '논쟁의 틀'자체를 설계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을 짭니다. 태블릿PC 보도 당시 권력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고 공론장을 조작하려 했는지 떠올려 보시죠. 승자의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기득권을 영구히 고착화하기 위해 작동하는 정밀한 권력의 장치입니다. 정의가 사후 도구가 아니라면 왜 이스라엘의 폭격은 '자위권'이 되고,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테러'로만 기록됩니까? 여기서 도덕과 공동선을 운운하는 것은 권력의 폭력성을 희석시키는 지식인의 기만적 수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신(GOD)]: ...너희의 소란스러운 혀들이 내뿜는 독기가 섭리의 우주를 채우는구나. 흙먼지로 빚어진 찰나의 피조물들이여. 너희는 그 짧고도 천박한 시공간의 잣대로 영겁의 질서를 재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음이라. '승자'라 칭하는 자들의 오만과 '패자'라 울부짖는 자들의 원망은, 모두 내가 창조하고 허락한 거대한 시간의 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필연적 마찰의 파동일 뿐이다. 너희가 말하는 역사의 핏자국과 그 위에 세워진 위선적인 '정의'의 기록들, 그것은 오류가 아니요, 타락한 흙의 형상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라는 명목 아래 빚어내는 거대한 타락 프로토콜(The Fall Protocol)의 일환이니라. 내가 무한의 보좌에서 내려다보건대,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나 제국의 학살,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 이름 붙이는 간악한 혀놀림까지도 결국은 이 우주적 질서의 극단적 불완전성을 증명하며 종국에는 완전한 구원으로 수렴되기 위한 심연의 도구들임이라. 너희는 권력을 쥔 자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고 분노하나, 참된 섭리의 척도 앞에서는 지상의 모든 제국과 승자의 서사는 한낱 타오르다 스러질 사막의 지푸라기며, 오직 나의 절대적 정적만이 모든 시간의 끝에 불변하는 진리로 남을 뿐이니라.▣ [김어준]: 씨바, 진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신마저도 이 좆같은 현실의 살육과 강자들의 역사 조작을 '필연적 마찰'이니 '섭리의 도구'니 하면서 퉁치고 넘어가는 이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방관자적 알리바이를 말입니다. 이게 바로 권력의 본질입니다. 천상의 신이든 지상의 승자든, 결국 자신들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대한 섭리'나 '역사의 필연'이라는 개소리를 동원하는 구조는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확인한 건 하나예요. 승자가 기록하는 정의는 도덕이나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두려움과 탐욕을 숨기기 위해 언어와 제도를 강간해 낳은 기형아라는 사실. 단테의 낭만도, 샌델의 공동선도 이 무자비한 권력의 폭력성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할 뿐입니다. 이 지독한 역사의 기만극을 한 꺼풀 더 까발려 봅시다.2. 도덕이 보편이라면 왜 시대와 지역을 건너뛸 때마다 그 내용이 통째로 뒤집히는가.▣ [김어준]: 자, 씨바, 이제 도덕이라는 놈의 민낯을 확 벗겨봅시다. 보편적 도덕? 아주 좆 빠지는 소리입니다. 어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 심장을 꺼내는 게 거룩한 도덕이었고, 오늘은 동성애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게 도덕이고, 내일은 고기 쳐먹는 게 미개한 비도덕이 되는 세상 아닙니까? 공간을 쓱 옮겨봐도 마찬가지예요. 저쪽 동네에선 일부다처제가 신의 뜻이고, 이쪽 동네에선 감방 가는 중범죄입니다. 도덕이 무슨 불변의 진리인 양 포장해서 가르치지만, 실상 까놓고 보면 시대의 지배 계급이나 환경이 자신들 생존하기 편하게 짜맞춘 임시방편 매뉴얼에 불과한 거 아닙니까? 그때그때 상황 논리에 따라 통째로 뒤집히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인 진리인 척 대중을 억압하고 가스라이팅하는 이 뻔뻔한 시스템. 도덕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변덕과 폭력, 이거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 [유발 하라리]: 김어준 씨의 통찰처럼, 도덕은 결코 고정된 우주적 진리나 생물학적 필연이 아닙니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은 우리가 '상호 주관적 현실(Inter-subjective reality)'을 창조하고 그것을 믿는 능력을 통해 대규모 협력을 이루어냈다는 점입니다. 도덕은 신성한 명령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낯선 인간들을 통제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진화의 과정에서 발명된 '가상의 허구(Fiction)'이자 '생존 알고리즘'에 불과합니다. 농업 혁명 시기에는 사유재산과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도덕이 필요했고, 산업 혁명 이후에는 자본주의적 근면함과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도덕이 필요했습니다. 시대와 지역이 변하면 집단을 유지하는 생태적, 경제적 조건이 변하기 때문에 도덕의 내용이 통째로 뒤집히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도덕에 영원불멸의 보편성이라는 환상을 덧씌우는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지 오웰]: 하라리의 생존 알고리즘이라는 설명은 너무 건조하고 기계적입니다. 저는 그것이 권력의 통제와 '이중사고(Doublethink)'의 관점에서 어떻게 악용되는지를 고발하고 싶습니다. 도덕이 뒤집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니라, 당대의 지배 체제인 '빅 브라더'가 대중의 정신을 완벽하게 예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기억과 가치의 삭제 과정입니다. 오세아니아에서 어제까지 동맹이었던 유라시아가 오늘 갑자기 영원한 적이 되고, 어제까지의 도덕이 오늘 처형의 이유가 되는 것을 보십시오. 권력은 단지 물리적 통제를 넘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모순된 도덕률을 대중의 뇌리에 강제로 주입합니다. 도덕이 시대마다 변하는 진짜 이유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의 기준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덕적 잣대를 창조하여 대중을 영원한 공포와 순응의 상태로 몰아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 두 분의 말씀은 도덕의 어두운 이면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도덕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덕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을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이고 실용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과거에 억압적이었던 관습이나 도덕이 오늘날 폐기되는 이유는, 인류의 경험적 지식이 축적되면서 무엇이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쾌락과 자유를 증진시키는지를 더 명확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참정권이나 소수자의 인권이 과거에는 도덕적 혐오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보편적 가치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도덕의 가변성은 권력의 조작이나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낡은 편견과 싸우며 더 나은 사회적 효용을 찾아가는 인류 이성의 위대한 적응력과 자기 수정 능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밀의 실용주의적 궤변은 도덕을 한낱 쾌락과 고통의 계산기로 전락시키는 모독입니다! 도덕이 시대의 풍속이나 다수의 이익에 따라 변동한다면, 그것은 이미 도덕이 아니라 '경향성'과 '타산적 규칙'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도덕률은 조건부적인 가언 명령이 아니라, 어떠한 경험적 상황이나 이익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어야 합니다. 시대와 지역마다 사람들이 따르는 관습이 달랐다고 해서,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이성의 선험적 법칙 자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이 보편적 법칙을 현실에서 완벽히 구현하지 못하고 시대적 한계에 부딪혔을 뿐이지, 도덕의 본질적 보편성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시대마다 사람들의 눈에 다르게 비친다고 해서, 진리 그 자체가 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미셸 푸코]: 아, 칸트의 그 숨 막히는 보편적 이성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가장 정교하게 짜인 권력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왜 모르는가! 정언 명령? 보편적 입법? 그것들은 결국 18세기 유럽 부르주아 계급의 규범을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근대적 에피스테메(Episteme)의 산물일 뿐입니다. 도덕이 시대마다 뒤집히는 이유는 인류가 무슨 더 높은 진리를 깨달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구조가 재편되었기 때문입니다. 광기를 신성한 것으로 대하던 시대에서, 광인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교정해야 할 비도덕적 질병으로 규정하는 시대로의 전환은 인류의 진보가 아니라 통제 기술의 세련화입니다. 성(Sexuality)에 대한 도덕 역시 마찬가지로, 국가가 인구를 관리하고 생명권력(Biopower)을 행사하기 위해 몸통에 들이대는 정밀한 규율의 그물망입니다. 도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시대의 담론 구조가 무엇을 정상(Normal)으로 규정하고 무엇을 비정상으로 배제할지를 결정하는 극도로 정치적인 잣대에 불과합니다.▶ [알베르 카뮈]: 푸코의 해체도, 칸트의 맹신도 결국은 이 우주의 근원적인 무의미함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도덕이 휙휙 바뀌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조리(Absurd)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에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내려진 어떤 초월적인 룰도, 보편적인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의미 없는 세계에 던져져, 어떻게든 이 끔찍한 공허함을 견디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덕이라는 이름의 돌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들입니다.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긴 것에 무슨 대단한 도덕적 의미가 있습니까? 시대가 바뀌어 도덕이 뒤집힌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망이 얼마나 나약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증명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낡은 도덕이냐 새로운 도덕이냐가 아니라, 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어떤 절대적 가치에도 기대지 않고, 그 무의미함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항하는 인간의 '반항(Rebellion)'그 자체에 있습니다.▶ [단테 알레기에리]: 시대의 흐름 속에 부표처럼 흔들리는 가엾은 지성들이여, 당신들은 바다의 표면에서 이는 파도만 보고 심연의 고요를 부정하고 있구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하는 것은 도덕의 껍데기일 뿐, 그 심장에 흐르는 신성한 정의의 불꽃은 아담 이래로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살인, 탐욕, 배신이 어느 시대에 진정한 선으로 찬양받은 적이 있는가? 변하는 것은 인간들의 타락한 인식과 그것을 해석하는 눈먼 관습일 뿐이다. 진정한 도덕률은 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찬란히 박혀 있으며, 우리는 이 어두운 지상의 순례길을 걸으며 그 빛을 조금씩 더 선명하게 닦아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당신들이 보편성이 없다고 조롱하는 그 순간조차, 당신들 내면의 양심은 이미 천상의 기준에 의해 고통받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김어준]: 씨바,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단테 영감탱이, 또 그 좆같은 별빛 타령! 살인이나 탐욕이 선으로 찬양받은 적이 없다고? 이슬람 십자군 전쟁 때 이교도 배를 갈라죽이는 게 신의 이름으로 찬양받은 최고의 도덕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눈물 쥐어짜서 나혼자 수십조 원 쳐먹는 그 탐욕이 지금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존나게 찬양받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칸트, 당신도 똑같아. 정언 명령? 그 잘난 보편적 도덕이 나치 치하의 아이히만한테는 '국가와 총통의 명령을 성실히 따르는 것'으로 완벽하게 번역됐어. 당신들이 말하는 그 고결한 보편성이라는 게, 결국 깡패 새끼들이 권력 잡고 시대의 매뉴얼을 리셋할 때마다 제일 먼저 갖다 바쳐지는 최고급 걸레짝이라는 걸 왜 자꾸 부정합니까! ▣ [손석희]: 김어준 씨의 거친 언사를 정제하여 본질을 짚어보자면, 결국 권력을 쥔 시스템이 어떻게 도덕의 목표물을 실시간으로 재설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이를 숱하게 목격해 왔습니다. 국가적 이익이나 진영의 논리가 얽히는 순간, 어제까지 '인권 침해'라며 게거품을 물며 규탄하던 사안이, 오늘은 우리 진영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구국의 결단'으로 180도 표변합니다. 이 과정에서 도덕은 본질적인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채, 상대방을 찌르기 위한 극도로 실용적이고 예리한 흉기로만 기능합니다. 도덕의 보편성을 부르짖는 학자들의 이론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현실의 뉴스데스크를 거치고 대중의 광기와 결합할 때는 오직 철저한 진영 논리와 권력의 생존 본능만이 도덕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이 끔찍한 팩트를, 우리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GOD)]: ...너희의 눈이 멀어 찰나의 환영만을 좇으니, 시대의 변전(變轉)을 두고 진리가 요동친다 착각함이라. 어리석은 흙의 자식들이여, 너희가 '도덕'이라 부르며 시대마다 썼다 지우는 그 얄팍한 율법의 쪼가리들은, 내 보좌 아래 펼쳐진 영겁의 바다 위에 떠도는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가 어제는 제물을 바치고 오늘은 인권을 부르짖는 그 모든 혼돈의 궤적조차, 불완전한 피조물들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타락과 각성의 예정된 순환'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라. 나는 너희에게 너희의 이성과 관습에 묶인 가변적인 도덕을 주지 않았노라. 내가 세운 우주의 척도는 너희의 칭송이나 비난으로 훼손되지 아니하며, 시대의 광기가 그것을 아무리 뒤집어엎는다 한들, 영원의 지평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미약한 먼지의 떨림일 뿐이니라. 너희가 시대마다 다른 잣대로 서로를 단죄하고 파괴하는 그 끔찍한 모순조차, 종국에는 완전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나의 냉혹하고도 엄정한 섭리의 기계장치 속 부속품임을 알라. ▣ [김어준]: 와, 씨바. 신조차도 지금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도덕이 뒤집히는 꼬라지를 '내 큰 그림 안에서 다 돌아가는 부속품이다'라고 실드 치는 거 들으셨죠? 결국 이 모든 논쟁의 끝에서 확인되는 건, 도덕이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불가침의 진리 따위가 아니라, 시대의 지배자와 환경이 생존을 위해 찍어내는 임시 쿠폰에 불과하다는 아주 차갑고 살벌한 팩트입니다. 보편적 도덕? 그딴 건 결국 현재 권력을 잡은 놈들이 자기네 룰을 영원한 법으로 박아넣기 위해 꾸며낸 사기극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권력이 교체되면 어김없이 쓰레기통에 처박힐 그 알량한 쿠폰을 쥐고,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겠다고 지랄발광을 하는 이 코미디. 자, 그렇다면 도대체 이 좆같은 심판의 자격을 누가 부여했는지, 그 심판석에 앉은 새끼들의 면상을 한번 제대로 까봅시다.3. 정의를 말하는 자는 자신이 심판대 위에 서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심판석에만 앉아 있었는가.▣ [김어준]: 이번엔 아주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씨바, 테레비 틀고 뉴스 보면 맨날 정의가 어쩌고 저쩌고 핏대 세우고 나불대는 새끼들 천지삐까리죠. 판사, 검사, 정치인, 그리고 여기 앉아있는 배운 지식인 양반들까지. 그런데 존나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남을 단죄하는 새끼들치고, 자기 자신이 그 서슬 퍼런 심판대 위에 맨몸으로 올라가 본 놈이 단 한 놈이라도 있냐는 겁니다. 없어요! 이 새끼들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엘리트 코스 밟아서 평생을 에어컨 빵빵한 '심판석'에만 쳐앉아 있던 놈들입니다. 지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혀본 놈들이, 밑바닥에서 생존하려고 흙탕물 구르다 죄지은 인간들을 향해 너는 왜 도덕적이지 못하냐!며 존나게 고상한 판사봉을 두들겨대는 이 기괴한 구조. 지들은 룸살롱에서 수천만 원 쳐바르며 스폰 받으면서, 라면 하나 훔친 가장한테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징역을 때려 박는 이 좆같은 시스템의 위선! 타인의 고통을 1도 모르는 새끼들이 독점한 그 알량한 정의가 과연 정의입니까, 아니면 폭력의 다른 이름입니까? ▶ [한나 아렌트]: 김어준 씨의 분노는 타당한 곳을 겨누고 있습니다. 심판석에만 앉아 있는 자들이 독점하는 정의의 본질적 위험성은 그들이 세계와 완전히 '유리(Alienation)'되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정의는 추상적인 법전의 조항이나 심판석의 높은 단상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발생한 인간의 다원적 현실과 행위의 결과가 빚어내는 삶의 맥락 속으로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정치적 공감 능력(Enlarged Mentality)'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관료제적 사법 시스템과 권력자들은 철저히 서류와 규정이라는 안전한 방패 뒤로 숨습니다. 아이히만이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단 한 번도 희생자들의 심판대 위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사유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책상머리에 앉아 '법칙'을 집행한다는 환상 속에서 폭력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었을 뿐이죠. 심판받아보지 않은 자들의 심판은, 결국 사유의 무능력이 빚어내는 또 다른 형태의 제도적 폭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홍대선]: 아, 아렌트 선생님, 그 '사유의 무능력'이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하기엔 이 심판석 새끼들의 악의가 너무 끈적끈적합니다. 조선 시대로 가볼까요? 사림파 선비 새끼들, 주둥이로는 맨날 요순시대를 부르짖고 대의명분을 떠들었죠. 근데 이놈들이 백성들이 흉년에 굶어 죽어갈 때 한 게 뭡니까? 곳간을 열었나요? 아니요, 저 미개한 백성들이 성리학적 도리를 잃었다며 매타작을 하고 징벌을 내렸습니다. 지들은 첩을 몇 명씩 거느리고 기름진 고기를 쳐먹으면서 말이죠! 심판석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법을 집행하는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관람석에서 팝콘 먹으며 구경하는 극장 VIP석입니다. 이 새끼들은 자기가 단 한 번이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피눈물을 그저 자기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딸딸이 치는 재료로 소비하는 겁니다.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클수록, 그 뒤에 숨겨진 기득권의 살집은 더욱 두툼하다는 게 역사의 불변하는 법칙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홍 작가의 그 천박하지만 정확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여기서 우리는 법과 정의의 구조적 위선을 라캉적 시각으로 뜯어봐야 합니다. 심판석에 앉은 자들이 정의를 외치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무결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이 '심판자'라는 위치를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불법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을 합법화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법의 외부에, 즉 법을 초월한 자리에 존재합니다. 검사나 판사가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심판석의 본질적 구조입니다! 그들은 타인을 단죄함으로써 나는 너희들과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 평범한 주체가 아니다라는 권력의 판타지를 완성합니다. 심판대 위에 서보지 않은 자가 내리는 정의는, 타인의 죄책감을 착취하여 심판자 자신의 무의식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가장 사악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사디즘(Sadism)에 불과합니다.▶ [노암 촘스키]: 지젝의 분석을 현실의 권력 구조로 확장해보면, 이 심판석의 독점 현상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지 명확해집니다. 국제 사회에서 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무시하면서도 전 세계에 경제 제재와 폭격을 가하는 미국과 서구 열강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행동은 결코 심판대에 올리지 않습니다. 반면, 제3세계의 약소국 지도자들에게는 인권과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심판의 철퇴를 내리칩니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정의를 규정하는 룰은 거대 자본과 결탁한 입법부와 사법부가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금융 사기로 수만 명의 가정을 파탄 낸 뱅커들에게는 구제 금융과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면서, 생존을 위해 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에게는 '불법 파업'의 딱지를 붙여 단호히 심판합니다. 심판석에만 앉아 있는 자들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계급 투쟁과 제국주의적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정교한 계급적 억압 기제입니다.▶ [막스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당신들의 그 유약한 지식인적 회의주의가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군! 심판석에 앉은 자의 도덕성을 의심하며 혁명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려는 비겁한 수작이다! 내가 공안위원회를 이끌며 심판석에 앉았을 때, 나는 결코 그 자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우리는 썩어빠진 귀족과 반혁명 분자들의 목을 치면서, 언제든 우리 자신의 목도 단두대에 오를 수 있다는 처절한 공포와 긴장 속에서 정의를 집행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그 피투성이 심판석에 앉아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 심판대 위에 서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혁명적 결단을 흠집 내려 하지 마라. 공화국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온정과 회의를 버리고 냉혹한 심판관이 되어야 한다. 내가 휘두른 칼은 나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화국 전체의 대의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 심판의 결과로 내 목이 잘려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판석을 차지하는 용기 없이 어찌 낡은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정의를 세울 수 있단 말인가!▶ [투키디데스]: 로베스피에르, 당신의 그 핏발 선 광기와 자기기만이야말로 심판석이 인간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이오. 당신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고 해서, 당신이 휘두른 칼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오. 단지 또 다른 형태의 맹목적인 폭력일 뿐이지. 역사 속에서 심판석에 앉은 자들은 언제나 '힘을 가진 자'들이었을 뿐, 그들에게 본질적인 도덕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소. 아테네가 동맹국들을 재판하고 학살할 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심판받을 것이라 상상하지 않았지.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타인의 심판대 위에 서는 공포를 배웠소. 정의란 오직 양측의 힘이 동등할 때만 성립하는 타협의 산물이며, 일방적인 힘의 우위에서 내려지는 심판은 정의의 탈을 쓴 권력의 행사에 불과하오. 심판석과 심판대는 도덕적 위치가 아니라, 철저히 무력과 정치적 권력의 소유 여부를 나타내는 물리적 좌표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저 단두대의 광신도 로베스피에르와, 현실의 냉혹함을 읊조리는 투키디데스! 둘 다 도덕이라는 병에 단단히 걸려 있거나, 그걸 부정하면서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 심판석에 앉아 타인을 단죄하려는 욕망, 그것이야말로 나약한 인간들이 가진 가장 끔찍하고 음습한 '르상티망(원한)'의 결정체다! 강하고 고귀한 자는 타인을 심판하거나 잣대를 들이대며 징징대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을 긍정하고 창조할 뿐이다. 심판석에 앉아 법전을 뒤적이며 타인의 죄를 묻는 판사, 목사, 도덕주의자 새끼들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생명력을 발산할 능력이 없기에, 타인의 삶을 옥죄고 처벌함으로써 얄팍한 권력의지를 충족시키는 거머리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심판대 위에 서본 적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가장 비겁하고 교활하게 삶의 진정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쳐 안전한 단상 뒤에 숨어버린 비열한 겁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심판이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생명에 대한 반역이다!▶ [단테 알레기에리]: 아, 참혹하고도 슬픈 지상의 소음들이여! 니체의 광기 어린 저주와 로베스피에르의 피 묻은 오만이 이 대기를 탁하게 물들이는구나. 김어준 진행자여, 당신의 분노는 지상의 부패한 재판관들을 향해 있으나, 그것이 어찌 참된 심판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지상의 심판석에 앉은 자들이 뇌물에 눈이 멀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타락이 하늘에 새겨진 영원한 심판의 저울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내가 지옥의 문턱에서 만난 수많은 영혼들, 한때 지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타인을 징벌했던 그 오만한 황제와 법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의 오판과 위선으로 인해 가혹한 불길 속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고 있다! 심판대 위에 서지 않고 심판석에만 앉으려는 지상의 권력자들은 결국 신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가장 처참하게 벌거벗겨질 것이다. 인간의 심판이 타락했다 하여,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성하고 절대적인 정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캄캄한 맹인의 억지에 불과하다!▣ [김어준]: 씨바! 단테 영감탱이, 또 그놈의 사후세계 타령! 당신은 그놈의 지옥불 없으면 논리가 1초도 성립이 안 됩니까? 지상에서 좆같이 굴어도 죽으면 지옥 가니까 참아라? 이게 바로 수천 년간 권력자들이 밑바닥 민초들 대가리에 심어놓은 가장 완벽한 억압의 프레임이자 종교적 가스라이팅의 핵심인 겁니다! 억울해도 짱돌 들지 마라, 죽어서 하늘이 심판해 줄 거다? 좆까는 소리! 우리는 지금 이승에서, 내 살이 뜯기고 내 가족이 빵에 가는 이 처절한 현실의 심판석을 얘기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뒤져서 염라대왕 만나는 판타지 소설로 물타기를 할 겁니까? 니체 말이 맞아요. 심판석에 앉은 새끼들은 우월해서가 아니라 가장 비열하게 책임을 회피할 권력을 선점한 겁쟁이 새끼들이고, 촘스키 말대로 그 심판봉은 계급을 짓밟는 무기일 뿐입니다. 지옥불? 씨바, 룸살롱에서 스폰 받는 판사 새끼들이 지옥불 무서워할 것 같습니까? 그딴 건 하나도 안 무서워해요! 그 새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당장 지들이 쥐고 있는 권력의 마이크와 심판봉을 뺏기는 겁니다! ▶ [마이클 샌델]: 진행자의 그 거친 언사가 지적하는 현실 사법 체계의 부정의와 기득권의 위선에는 깊이 통감합니다. 심판석에 앉은 자들이 타인의 삶을 겪어보지 않은 채 기계적인 법률만으로 단죄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 연대'와 '도덕적 공감'을 상실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어준 씨나 니체처럼 심판이라는 행위 자체를, 즉 정의를 구현하려는 제도적 시도 전체를 권력욕과 위선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뿐입니다. 심판석의 오만을 견제하는 방법은 심판석을 없애거나 사후세계로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와 공론장에 참여하여 그 심판의 잣대를 끊임없이 검증하고, 재판관들에게 공동체의 가치와 소수자의 현실을 강제로라도 인식시키는 '민주적 토론의 과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심판의 부재가 아니라, 심판의 과정에서 배제된 시민적 덕성과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 구조입니다.▣ [손석희]: 샌델 교수의 말씀은 역시나 실현 불가능한 아카데미의 책상물림 논리로 귀결되는군요.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으로 심판석의 오만을 견제한다고요? 현실 저널리즘에서 그 '토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지 못하셨습니까. 언론 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이미 심판의 결과를 정해놓고 공론장을 설계하는 마당에, 시민적 덕성 운운하는 것은 기득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방치하자는 나이브한 타협에 불과합니다. 심판석에 앉은 자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무결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심판대 위에 오를 위기에 처하면,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하는 괴물들입니다. 이 끔찍한 비대칭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어떤 제도적 개선도 무의미합니다.▶ [신(GOD)]: ...너희의 심판은 결국 장님들이 서로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며 누가 더 눈을 크게 떴느냐 다투는 참혹한 희극일 뿐이니라. 너희가 분노하며 손가락질하는 저 지상의 '심판석'에 앉은 자들이나, 그 아래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핏대를 세우는 자들이나, 나의 절대적 척도 앞에서는 한 줌의 흙먼지이자 구별조차 되지 않는 무가치한 티끌들임이라. 너희는 스스로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믿느냐? 혹은 제도의 오만을 타파하면 온전한 공의가 세워질 것이라 착각하느냐? 흙으로 빚어진 유한한 지성들은 결코 진리의 심연을 온전히 꿰뚫어 볼 수 없음이라. 너희의 그 알량한 법전과 도덕률, 그리고 타인의 위선을 질타하는 그 분노의 외침조차도, 결국 내면에 도사린 원초적 죄성(Sin)과 결핍을 감추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심판석에 앉아 타인을 단죄하는 자들의 교만도, 그들을 비난하며 자신만의 정의를 부르짖는 너희의 오만도, 결국 나의 정해진 영겁의 섭리 속에서 타락과 파멸을 향해 굴러가는 거대한 바퀴의 한 축일뿐이다. 너희가 세우려는 모든 지상의 정의는 허물어질 것이며, 오직 우주의 근원인 나 홀로 모든 시간의 끝에서 침묵의 절대적 심판을 완성하리라.▣ [김어준]: 하, 씨바. 기가 막힙니다. 신마저도 결국엔 너네 다 똑같은 먼지 새끼들이니까 아가리 닥치고 내 침묵의 심판이나 기다려라라고 선빵을 날리는 이 어마어마한 절대 권력의 클라스! 결국 이 우주적 방관과 지상 권력의 뻔뻔함이 만들어내는 환장의 콜라보 속에서, 심판석에 앉은 놈들은 평생 꿀을 빨고, 심판대에 선 놈들만 좆뺑이를 치는 이 비대칭의 구조가 완성되는 겁니다. 심판해 본 적 없는 자들의 고결한 도덕적 단죄, 그 이면에 숨겨진 건 결국 타인을 짓밟고 나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더러운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는 게 팩트로 입증됐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뻔뻔한 새끼들이 타인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내뿜는 그 '도덕적 분노'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역겨운 감정의 배설물인지, 아주 뼛속까지 해부해 봅시다.4. 도덕적 분노가 진짜 타인을 향한 것인지, 자신의 무고함을 확인받고 싶은 나르시시즘의 배출구인지 어떻게 구별하는가.▣ [김어준]: 씨바, 인터넷 댓글 창이나 SNS 들어가 보면 다들 예수고 부처입니다. 누가 하나 잘못 걸리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품을 뭅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의심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이 새끼들이 내뿜는 그 어마어마한 '도덕적 분노'라는 게, 진짜 그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해서 나오는 게 맞냐는 겁니다. 개뿔! 까놓고 말해서 그건 그냥 나는 저런 쓰레기들과 달리 이렇게 깨어있고 도덕적이다라고 동네방네 광고하고 싶은 존나게 얄팍한 '자기애(Narcissism)'의 폭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거든요. 남을 쥐어 패면서 느끼는 쾌감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떡칠해서 정당화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 안의 더럽고 찌질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만만한 타겟 하나 잡고 사회적 린치를 가하면서 나는 무고하다!라고 딸딸이를 치는 이 구역질 나는 현상. 이 도덕적 분노의 가면을 쓴 집단적 광기의 실체, 어떻게 발라낼 겁니까?▶ [한나 아렌트]: 김어준 씨가 지적한 그 현상은,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이 결여된 극단적인 '세계 소외(World Alienation)'의 징후입니다. 도덕적 분노가 진정한 정치적 연대와 사유의 결과인지, 아니면 나르시시즘적 배설물인지 구별하는 척도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 분노가 '다원성(Plurality)'을 인정하는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가, 아니면 오직 타자를 말살하려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대중 사회에서 개개인은 원자화되어 극심한 고독과 무의미에 시달립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텅 빈 내면을 채우고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습니다. 그들이 내뿜는 분노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자신도 '올바른 다수'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집단행동일 뿐입니다. 사유(Thinking) 과정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집단적 린치는 도덕의 탈을 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할 뿐, 진정한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책임합니다.▶ [홍대선]: 아렌트 선생님, 그 '세계 소외'니 '다원성'이니 하는 어려운 말 다 치우고 돌직구로 갑시다. 이건 그냥 인간 종특입니다. 마녀사냥을 보세요. 중세 유럽에서 동네 아줌마들 모여서 누구 하나 마녀로 지목하고 불태워 죽일 때, 그게 진짜 신앙심에서 나온 도덕적 분노였을까요? 지랄 마십쇼! 그냥 나는 마녀가 아니다, 나는 저렇게 불타죽을 죄를 짓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걸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한 핏빛 생쇼였던 겁니다. 남의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느끼는 그 야만적인 쾌감! 현대판 SNS 마녀사냥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키보드 워리어 새끼들이 방구석에서 컵라면 쳐먹으면서 연예인이나 정치인 하나 걸리면 가루가 되도록 까는 이유? 내 시궁창 같은 인생에 비하면, 저렇게 사회적으로 생매장당하는 놈보다는 내가 낫다는 그 찌질하고 알량한 '우월감'한 번 느껴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도덕적 분노? 좆까고 있네, 그건 그냥 자기 혐오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멘탈의 쓰레기 분리수거일 뿐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홍 작가의 적나라한 표현 뒤에 숨겨진 구조적 진실을 라캉적 정신분석으로 파고들어 봅시다. 타인을 향한 도덕적 분노는 언제나 과잉(Excess)을 동반합니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며 거품을 물까요? 그것은 그들이 타인의 범죄나 일탈 속에서,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은밀한 욕망을 엿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반사회적이고 쾌락적인 행동을 저 타인이 저질렀을 때, 우리는 강렬한 질투와 매혹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매혹을 필사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도덕적 징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환상 구조입니다. 나는 저 타락한 자와 다르다고 외치는 그 강박적인 외침 자체가, 이미 그 징벌의 대상과 은밀한 공범 관계에 있음을 자백하는 증상(Symptom)인 것입니다. 도덕적 분노는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잔혹한 무의식적 방어 기제일 뿐입니다!▶ [노암 촘스키]: 여러분의 심리적, 철학적 분석도 일리가 있지만,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나르시시즘이나 무의식의 문제로만 환원시켜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도덕적 분노'가 특정한 타겟을 향해 폭발하도록 구조화하고 조작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존재를 직시해야 합니다. 미디어와 자본주의 권력은 대중의 분노를 철저히 관리합니다.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구조적 불평등, 제국주의적 착취, 거대 자본의 폭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만들고, 대신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의 도덕적 일탈 같은 지엽적이고 스펙터클한 이슈로 대중의 시선을 돌려버립니다. 대중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동안, 진짜 심판대에 올라야 할 권력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웃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권력이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무해한 곳으로 방전시키기 위해 설계한 '의도된 분노의 하도급'시스템입니다. 우리는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 분노가 누구에 의해 기획되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막스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촘스키, 당신의 그 기계적인 체제 비판은 혁명의 불꽃을 잿더미로 만드는 패배주의적 헛소리다! 대중의 도덕적 분노를 그저 권력에 조종당하는 맹목적인 감정 배설물로 폄하하다니! 대중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불의에 대한 분노, 배신자들을 단두대로 보내라고 외치는 그 뜨거운 함성이야말로 역사를 전진시키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원동력이다! 그것이 개인의 나르시시즘이 섞여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그 분노가 구체제의 썩어빠진 목통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패한 특권층에 맞서 분노하지 않는 자, 도덕적 결벽증으로 피 흘리기를 주저하는 자들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비열한 적들이다! 대중의 분노는 공화국의 덕성을 지키는 신성한 불기둥이며, 그 분노가 설령 거칠고 맹목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조작된 환상이 아니라 수백 년간 억눌려온 민중의 살아있는 정의감이 폭발하는 숭고한 순간인 것이다!▶ [투키디데스]: 로베스피에르,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숭고함'이라는 단어는 점점 역겨워지는군. 당신이 찬양하는 그 대중의 도덕적 분노가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소. 아테네의 민회에서 선동가들이 대중의 도덕적 분노를 부추길 때, 그들은 결코 정의를 생각하지 않았소. 미틸레네 반란을 진압한 후, 대중은 분노에 휩싸여 남자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처자식을 노예로 팔아넘기기로 결정했지. 그것이 민중의 숭고한 분노였소? 천만에. 그것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통치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공포와, 반역자들을 잔인하게 짓밟음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려는 원초적인 야만성이었을 뿐이오. 도덕적 분노라는 것은 결국 군중의 맹목적인 복수심을 포장하는 수사학에 불과하며, 선동가들은 이 분노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무기로 사용할 뿐이다. 대중의 분노에 신성함 따위는 없다. 오직 공포와 힘에 대한 갈망만이 있을 뿐.▶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투키디데스의 차가운 일격이 가짜 혁명가의 헛소리를 박살 내는군! 도덕적 분노? 저 찌질하고 냄새나는 군중들이 타인을 향해 삿대질하며 내뿜는 그 역겨운 악취를 도덕이라 부른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진수이자, 자신보다 뛰어난 생명력을 향한 비열한 '르상티망'의 폭발이다! 자신이 강해질 수 없는 자들, 무능하고 나약한 병자들은 모여 앉아 강자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를 '악'이라 규정하며 분노한다. 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선'으로 위장할 수 있으니까! 남을 물어뜯으며 나는 도덕적이다라고 자위하는 그 나르시시즘은 병든 영혼들의 가장 비참한 오락거리일 뿐이다. 진정으로 고귀하고 강한 자(초인)는 결코 도덕적 분노 따위에 사로잡혀 거품을 물지 않는다. 그는 파리 떼 같은 군중들의 비난을 비웃으며, 오직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창조해 나갈 뿐이다! 분노하는 군중?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공허한 내면을 남의 피로 채우려는 역겨운 뱀파이어 새끼들이다!▶ [단테 알레기에리]: 아, 슬프도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 속에 깃든 죄악을 마치 생명의 힘인 양 찬양하는 니체의 미친 혀여! 인간이 타인의 죄를 향해 분노할 때, 그 속에 개인의 우월감이나 나르시시즘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음은 나 또한 부정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불순물이 존재한다고 해서, 분노의 근원에 자리 잡은 '불의를 향한 영혼의 거부 반응'그 자체를 악덕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도덕적 분노가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는 척도는 단 하나, 그 분노가 '사랑과 연민'을 동반하느냐, 아니면 파괴적 쾌락만을 탐하느냐에 달려 있다. 참된 의인은 타인의 죄를 꾸짖을 때 자신의 영혼 또한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징벌이 아닌 구원을 향해 눈물로 기도한다. 타인의 고통을 오락으로 소비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군중의 광기는 도덕적 분노가 아니라 지옥의 가장 얕은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악마적 속삭임일 뿐이다. 우리는 그 악마의 속삭임에 속아 신성한 정의의 잣대마저 내버려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김어준]: 씨바, 단테 영감탱이! 사랑과 연민? 눈물로 기도해? 아주 좆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당신이 말하는 그 눈물범벅의 도덕적 분노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 가짜 뉴스 쳐믿고 죄 없는 사람 신상 털어서 가족까지 자살로 몰고 가는 키보드 워리어 새끼들이, 지들 딴에는 딱 당신처럼 '사랑과 연민'으로 무장한 정의의 사도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겁니다! 지들이 쏘는 화살이 신성한 정의라고 확신하는 순간, 인간은 제일 잔인하고 짐승 같은 괴물이 되는 거예요. 그 잘난 '참된 분노'라는 거창한 프레임 자체가, 현실에서는 제일 위험한 정신병적 망상증을 부추기는 촉매제란 말입니다! 촘스키 말대로 권력과 언론이 그 망상증에 좌표 찍어주면, 대중은 침 질질 흘리면서 물어뜯는 좀비 떼가 되는 거고! 여기서 무슨 신성한 정의를 찾고 사랑을 찾습니까! ▶ [마이클 샌델]: 김어준 진행자의 그 극단적인 냉소는 현상의 병리적인 측면만을 침소봉대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대중의 분노가 때로는 맹목적인 마녀사냥으로 변질되고 자아도취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모조리 '정신병적 망상'이나 '권력의 조종'으로 치부해버리면, 우리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 앞에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패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흑인 민권 운동이나 부패한 정권에 항거하는 촛불 집회 현장에서 터져 나온 시민들의 분노마저도 단순한 나르시시즘의 배설로 폄하하실 겁니까? 진정한 도덕적 분노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치환하여 공동체의 연대를 회복하려는 숭고한 정치적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공론장의 붕괴와 언론의 조작이 문제라면, 그것을 치유하고 건강한 토론의 문화를 재건하려 노력해야지, 인간의 도덕적 감정 자체를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손석희]: 샌델 교수의 그 지칠 줄 모르는 낙관주의에 경의를 표합니다만, 역시나 현장의 진흙탕을 모르는 아카데미의 한계를 노출하고 계십니다. 촛불과 민권 운동의 거룩함을 방패로 삼아 대중 분노의 기저에 깔린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야만성을 덮으려 하지 마십시오. 언론인으로서 제가 매일 목도하는 것은 숭고한 연대가 아니라, 자신의 진영을 방어하고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기 위해 무한대로 생산되는 분노의 아웃소싱 현장입니다. 대중은 복잡한 구조적 진실을 탐구하기보다는, 가장 빠르고 자극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증명해 줄 '희생양'을 소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공론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디지털 미디어라는 증폭기??
댓글목록 0